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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l 04. 2019

습작

쉰여섯번째

 “이건 좀 당혹스러운데” 과장은 하릴없이 서류뭉텅이를 뒤적거렸다. “우리가 무슨 사람을 뽑는다고 공고를 냈었더라, 사무보조 뽑는 거 아니었어?”     


 “네. 사무보조 한 명이요” 사원이 대답했다.     


 “그런데 이력서가 천이백 건이나 왔다고?”     


 “네. 그러네요”     


 “이야, 취업난이다 말만 들었지…… 이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과장은 이력서 가운데 한 장을 집어 들고 말했다. “야, 너는 텝스가 몇 점이냐?”     


 “텝스는 쳐본 적이 없는데요. 토익은 좀 했었지만”     


 “토익은?”     


 “하도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8백점 조금 안 됐던 것 같은데요”     


 “얘는 텝스가 8백점이야. 이 밑에 있는 건 고려대 졸업예정자고, 또 밑에 있는 애는 국제 공모전에서 금상을 탔다는데…… 뭔데? 프린터 복사 좀 하고, 엑셀 좀 만질 줄 알고, 인간관계 정도만 원활하면 할 수 있는 일에 왜 이런 애들이 지원하는 거냐고?”     


 “뭐, 시대가 시대니까요”     


 “아니, 그건 나도 아는데……” 과장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부서잖아. 최근에 투자를 받긴 했지만 우리가 무슨 재벌기업도 아니고…… 사무보조로 이런 애들을 뽑아야 하는 회사 입장도 생각을 좀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똘똘한 자식들이 나갈 땐 그냥 나가겠어? 과연 평생 사무보조에 만족하겠느냔 말이지”     


 “하긴 그렇죠? 매일 프린터나 엑셀 만지려고 스펙 쌓은 건 아닐 테니까요”     


 “아무튼, 대기업에서 인사팀을 왜 따로 두는지는 알겠네. 이 많은 걸 일일이 만나볼 수도 없고…… 골치 아프네 이거”     


 “그냥 편하게 생각하시는 게 어떨까요? 이왕 뽑는 거 똘똘한 애로 뽑는 게 좋잖아요. 아무리 사무보조라도 명문대 나온 친구랑 지방대 나온 친구는 차이가 있겠죠. 어학점수도 낮은 것보단 높은 게 더 좋을 거고요”     


 “근데 넌 대체 어떻게 뽑힌 거야? 내가 모르는 특출 난 게 있나?”     


 “글쎄요, 미모의 여사원이라는 거 빼면……” 사원은 깊이 고민했다. “전국 피아노 콩쿠르에서 3등을 한 적은 있었네요. 초등학생 때”     


 “일이 많이 힘들면 하루 쯤 쉬어도 돼” 과장은 사려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다음 달 대체 휴일 있는 주에 한꺼번에 쓸 거라서요”     


 “아, 됐어. 가봐. 이번엔 최대한 똑똑한 놈으로 뽑아야겠어” 과장이 말했다.     


-     


 “하!” 과장이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서류뭉텅이를 뒤적거렸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왜 그러세요, 과장님?” 마침 과장 옆자리를 지나가던 사무보조가 근심어린 투로 물었다. 유학생활의 후유증인지, 다소 어색했던 한국말도 한결 나아진 모양새였다.     


 “아니, 지난번에 우리가 냈었던 채용공고 있잖아?”     


 “아, 그 신규서비스 마케터 뽑는 거 말씀이시죠?”     


 “맞아, 그거. 이력서 제출이 어제 마감돼서, 오늘 검토하고 있는데 기도 안 차는구만” 과장은 이력서 한 장을 집어 들더니, 보란 듯이 반으로 찢어버리며 말했다. “몇 명은 나쁘지 않은데, 진짜 터무니없는 놈들도 지원했더란 말이야. 지잡대 수석졸업을 자랑스럽게 써놓는 놈이 있질 않나. 심지어 어떤 놈은 토익 6백점에 전문대 졸업을 무슨 이력이라고 자랑스럽게 써놨더라고! 제까짓 놈들이 감히, 우리 회사를 뭘로 보고……”     


 “하, 참내. 맞는 말씀이십니다, 과장님. 일을 우습게 보는 친구들은 뽑으면 안 돼요, 정말로요” 사무보조가 살갑게 맞장구쳤다. “한동안 골치 좀 아프시겠어요”     


 “어휴, 그러게 말이야. 별 어중이떠중이 같은 놈들 때문에……” 과장이 말했다.          


<다홍치마>, 2019. 7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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