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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l 26. 2019

습작

예순여덟번째

"우리가 같이 산지 얼마나 됐지?"     


나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물었다. 넌 헤드쿠션에 등을 기대고, 이불을 허리까지 올라오도록 덮은 채 책을 읽고 있었는데, 말을 걸자 내게 시선을 돌렸다. 네 얼굴에 마스크팩이 붙어있었다.     


"……"     


"그거 이제 떼도 될 걸? 붙인지 한 시간도 넘었어"     


내가 말했다. 네가 어딘가 집중하다 못해 팩 떼내길 잊어버리는 건 꽤 자주 있는 일이었다. 너는 멍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나는 지금 움직이기도 싫고 책을 잡고 있으니 네가 잡아 떼줘, 하는 눈치를 던졌다. 난 한숨을 짧게 쉬었다. 그리고 네 얼굴에 붙어있는 팩을 턱 부분에서부터 잡고, 이마 위까지 잡아 올려 떼냈다.     


"쓰레기통에 버리면 돼"     


"알고 있어"     


내가 대꾸했다. 손끝으로 잡은 마스크팩은 한 시간이 넘게 지났는데도 물기가 남아있었다. 난 일어나 팩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다시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대답은?"     


"음…… 미안, 뭐라고 물었더라?"     


넌 책에 도로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되물었다. 난 입술을 양쪽 끝으로 늘려보였다. 무안할 때의 내 버릇이었다. 

    

"우리가 같이 산지 얼마나 됐냐고 물었어"     


"음, 글쎄, 사 년 하고, 삼 개월 쯤 된 것 같은데? 내가 팔월 즈음에 들어왔으니까……"     


"그렇구나"     


"근데 그건 왜?"     


너는 아직까지 책을 읽으면서 말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랑 결혼할 생각 있는지 물어봐도 돼?"     


내가 물었다. 너는 마침내 날 쳐다보는가 싶더니 다시 책을 바라봤다.     


"……그건 이미 질문이잖아. 물어봐도 되냐고 묻는 게 무슨 질문이야"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내가 머리를 긁으며 맞장구쳤다. 우리는 일 분 쯤 말없이 있었다. 넌 계속해서 책을 읽었고, 난 머리맡에 앉아 턱을 괴고 네 책 읽는 모습을 지켜봤다. 기묘하고도 안정적인 정적이었다.     


"나는 결혼할 생각 없어. 너 뿐만 아니라 누구하고도"     


네가 탁, 하고 양손으로 책을 포개 덮으며 말했다. 난 턱을 괸 손에서 얼굴을 떼고 네 표정을 살펴봤다.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왜? 지금이랑 별 차이도 없잖아? 말하자면 우리는 사실혼 관계고, 아이가 없다는 걸 제외하면 누구보다도 부부 같은 사이 아냐? 여기서 혼인신고만 더 하는 거잖아. 딱히 싫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별 차이도 없는데 왜 하려고 하는 거야?"     


잠자코 듣던 네가 말을 자르고 되물어왔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아니, 뭐, 나도 이제 서른이잖아. 여러모로 안정적인 상황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거지"     


"난 네 안정감을 위한 도구가 아니야"     


"알아, 그치만 차이가 나는 건 사실이잖아.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기준에서도 그렇고. 기혼자와 미혼자에게 주어지는 시선에 차이가 없다고는 할 수 없잖아? 언젠가 아이를 갖고 싶어질 수도 있는 거고……"     


"난 애 갖기 싫어. 너도 아이는 낳기 싫다며?"     


넌 언짢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쩌면…… 나중에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 생각이라는 게 말야"     


"나중에 생각이 바뀔 확률이 있으니까 지금 결혼하자고? 그게 말이 돼?"     


네가 매섭게 몰아붙여왔다. 난 더 이상 굳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또, 마음 깊은 곳에서 속상함인지 억울함인지 모를 감정들이 피어올랐다.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당연히 사랑하지"     


"그런데 왜 결혼하기는 싫다는 거야? 벌써 같이 산지 햇수로 오 년째잖아. 넌 내 가족보다도 더 가족 같은 존재가 됐고, 나도 너한테 엇비슷한 존재가 됐다고 생각해…… 솔직히 말하면 결혼하지 않고 그저 동거인 상태로 불안정하게 지내다가, 언젠가 네가 떠나버리잖아? 난 영영 다른 사람을 못 만날 것 같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기도 했고, 이 이상의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관계를 상상할 수도 없거든. 내 말은, 그저 서류 하나만 작성하면 된다는 거야. 서류만 작성하기 싫으면 사진 정도만 같이 찍어도 돼. 너도 웨딩드레스는 꼭 한 번 입어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게 결혼을 하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어. 정말 예쁜 드레스를 보면 입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 딱 그런 의미로 얘기한 거지"     


너는 무심한 듯 대답했다. 난 웬일인지 답답하고, 한편으로는 공허하면서 미운 마음까지 들었다. 눈물은 딱 나올 것 같은 느낌에서 그쳐버렸다.     


"난 그냥…… 너한테 있어 평생 동거인으로 남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이렇게 정의된 관계는 영 불안정하고, 또, 언제 멀리 떠나가 버릴지 무섭고"     


나는 먹먹해진 목소리를 냈다. 비참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내 머리 맞은편으로 시선이 느껴졌다.     


"……네 마음은 이해해.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같이 살고 있잖아. 사실상 부부관계인데 그걸 굳이 부부라고 정의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거야. 네가 말한 대로 별 차이가 없다면, 그냥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거잖아? 이건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프랑스에서는 가족이나 부부를 따로 정의하는 문서는 없고 그냥 동거계약서만 있다더라구. 무엇을 가족으로 정의할 수 있느냐고 하면, '생활공간을 공유하면서 친구 이상의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 이라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너는 이미 내 가족이고, 나도 네 가족인거지. 여기서 서로를 배우자라고 정의한들 무슨 차이가 있겠어?"     


"네가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차이가 있겠지. 내가 아주 작은 잘못을 하더라도"     


"애초에 잘못을 하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네가 원하는 건 '아무리 잘못을 하더라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얻는 안정감이야? 나는 있잖아, 행복한 연애나 동거생활을 거쳐 결혼으로 이어진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꽤 많이 봐왔어. 사람은 가졌다고 생각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무서우리만큼 함부로 대하지. 하지만 사람은 진정으로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상대방이 아무리 밉고 싫어도 배우자로 정의된 서류 때문에 떠날 수 없다면 그게 더 불안정한 거 아닐까?"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순간 튀어나오려고 했던 것은 논박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언제든 내가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은 슬프거나 불안정한 것이 아니야"     


"……그럼?"     


"네가 내 존재에 언제까지고 감사할 수 있게끔 되는 거지"     


네가 내 눈시울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옅게 미소 짓는 네 표정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그러나 나는 어느 날 떠나려던 네게 마땅히 남아야할 이유 하나 내밀지 못했고, 그래서 이 날의 기억을 영원히 후회하게 될 줄 꿈에도 알지 못했다.          


<선녀와 나무꾼>, 2018. 11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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