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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Jul 30. 2019

습작

예순아홉번째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지? 사람이……” 여자는 주저앉아 흐느끼면서 말했다. “보통은 그렇잖아, 하다못해 동물도 그래. 개도 사랑해주고 잘해주면 어떻게든 돌려주려고 하는데, 넌 대체 뭐야? 뭐냐고?”


 “아, 누가 해달라고 했냐고. 니가 해주고 싶어서 한 거 아니야? 이제 와서 왜 나한테 그래? 넌 세상이 다 너 중심으로 움직이는 줄 아는 것 같다니까, 가만히 보면” 남자는 휴대폰 화면에서 시선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동안 양쪽 엄지는 화면 하단을 번갈아 두드렸다.


 “제발! 내가 말 할 때는 휴대폰 하지 말고 내 말에 집중해주기로 했잖아. 지키지도 않을 약속이면 왜 했던 거야?”


 “난 약속한 적 없어”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니가 하도 뭐라고 하니까, 노력은 해보겠다고 한 거지. 노력해도 안 되는걸 뭐 어쩌라는 거야?”


 “니가 바뀌려고 노력하기는 해? 날 배려하는 마음이 있기는 하냐고!”


 “……야, 진짜 이기적인 게 누군지 알아?” 순간 남자는 돌연 휴대폰 전원을 끈 다음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허리 아래로 내팽개쳐진 여자를 깊이 내려다봤다. “너야, 너. 너는 나한테 맨날 이기적이라고만 하지? 근데 생각을 좀 해봐. 너는 나한테 맨날 뭐가 별로다, 뭘 고쳐 달라, 이걸 바꾸려고 노력은 하고 있냐,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 난 진짜 모르겠다니까. 니 머릿속에 있는 ‘노력하는 남자친구’가 어떤 이미지인지 말이야. 그저 확실한 건 난 니 이상에 적합하지 않다는 거고, 나한테는 이게 최선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나한테 이것저것 바라지 말라고. 아니, 애초에 넌 날 사랑한 것도 아니었어. 넌 니 상상 속에 있는 내 모습을 사랑한 거지. 정신 좀 차려, 제발!”


 “뭐라고? 난 니가 하라는 대로 다 해줬어. 언제든지 말만 하면 몸도 줬어. 니가 원하는 건 뭐든 갖다 바쳤어.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널 사랑하긴 하냐고? 정말 궁금해서 하는 말이야?”


 “아니, 궁금하지도 않아. 니가 날 사랑하지 않는 건 사실이니까. 날 정말 진심으로 사랑했으면,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내가 담배 피는 모습도, 밤늦게 술 마시는 모습도……”


 “아하, 몰래 다른 여자랑 자는 모습까지 말이야? 아니면 필리핀까지 놀러가서 조건만남 했던 것도?” 여자가 비아냥댔다. 다만 지나치게 울먹거리는 소리였다. 빈정거리기보단 무언가 고백하는 것에 가까워보였다.


 “그런 말은 좀 안 하면 안 되냐? 자꾸 내 죄책감을 자극하려고 해봤자 소용없다니까. 막말로, 이렇게 될 줄 알고 만난 거 아니었어? 이기적인 인간인 거 알고 사귀자한 거 아니었냐고. 그럼 니가 감수해야할 것들은 알고 있었어야지! 왜 나한테 이런 스트레스를 주는 거야? 짜증나게……”


 “그래, 맞아. 내가 하고 싶어서 했어. 이렇게 될 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어” 여자는 토해내듯이 대답했다. 표정엔 사뭇 비장한 느낌까지 감돌았다. 


 “그거 다행이네” 남자가 이죽거렸다.


 “그런데 너한테 이렇게 잘 해주는 사람한테, 이만큼 상처 줄 필요는 없었던 거 아니야? 나한테 왜 이렇게 못되게 굴었던 거야? 너 때문에 정말 죽고 싶어. 진심으로 죽어버리고 싶어. 응? 나 좀 죽여줄래? 제발, 이렇게 빌게……” 여자는 남자의 다리를 감싸 안았다. 


 “아, 이거 왜 이래? 자꾸 짜증나게 할래?” 남자는 완력으로 여자를 밀쳐내 떨어뜨렸다. 여자는 힘없이 내팽개쳐졌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며 왼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이 한데 뒤엉켰다. 차가운 돌바닥에 기척도 없이 쓰러진 것이 흡사 주검처럼 보이기도 했다.


 “야, 또 시체놀이 하는 거야?” 남자는 양손바닥을 맞대 툭툭 털어가며 말을 뱉었다. 뭔가 더러운 것이라도 만졌다는 시늉이었다. “한두 번도 아니라서 이젠 아무렇지도 않네. 그래도 이건 니가 너무 한 거야. 알지? 하지 말라는 데 왜 하고 난리야. 여자면 남자한테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줄 아나봐?”


 “……죽여 버릴 거야” 여자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이쯤 되면 니가 날 죽여야지. 내가 널 죽일 게 아니라…… 그런데 넌 그러지도 못해. 인간이 한심해 빠져가지고. 나도 정말 여자 많이 만나봤지만, 너 같은 여자는 정말 처음 봐. 여자들이 대체로 피학적인 경향이 있긴 한데, 너는 자존감이라는 게 없는 애 같다니까. 나 같은 쓰레기 말고 좀 정상적인 애를 만나, 좀! 나도 귀찮아 죽겠으니까!”


 “……” 여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아련하고 쓸쓸한 표정으로, 이 모든 비극을 잉태시킨 스스로를 원망하며 거기 쓰러져 있었다.


 남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남자의 뒷모습은 가로등 불빛에 진한 오렌지색으로 잠깐 젖었다가, 이내 한밤중으로 사라져갔다. 


 그날 밤 이후 여자는 남자에게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남자는 역시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다고, 후련한 기분에 잠겨 마음껏 자유를 만끽했다.      


 남자가 병원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서였다. 언제부턴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과 울렁거림, 오한이 번갈아 계속됐다. 남자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았다. 


 “결과는, 양성으로 나왔습니다” 의사는 전에 없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일을 시작한 지 꽤 됐는데도 익숙하지가 않아서…… 이런 상황에 어떻게 말씀드려야할지 참 난감합니다”


 남자는 그런 의사의 말투며 얼떨떨한 표정이 방금 불치병을 확진 받은 환자에 대한 배려인 건지, 아니면 혹시 모를 감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 마룻바닥에 질서 없이 퍼질러진 옷가지와 잡동사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당장 이틀 전에 관계했던 이름 모를 여자가 뇌리를 스쳤다.


 대단한 엉덩이를 가졌던 그 여자는 ‘안전한 날이니 그냥 해도 상관없다’고 말해왔다. 남자는 몹시 흥분한 나머지 질내에만 두 번 사정했다. 전염은 명백했고, 죄책감에 잠 못 이루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불현듯 두 달 전 여자와 있었던 실랑이가 떠오른 것이다. 남자는 뒤늦게 차단했던 여자의 번호를 복구했다. 다만 실제로 전화를 건 것은 이틀이 지난 오후였는데, 시간이 더 지난 뒤에는 그 이틀마저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오랜 신호 끝에 전화를 받아든 것은 여자의 모친이었다. 한 달 전에 있었던 딸의 죽음을, 어머니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해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남자는 힘겹게 운을 뗐다. “자살이었나요?”


 “아뇨” 어머니가 대답했다. “병으로 죽었습니다”          


<이기적 이타심>, 2019. 7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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