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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묵돌 Aug 09. 2019

습작

일흔네번째

 정말이지 이상한 사건이었다. 도굴이나 시체훼손이라는 것부터가 요즘 시대에 통 보기 드문 범죄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피의자의 신분이 최근 로스쿨을 수료한 뒤 막 검사임용을 앞두고 있던 한 젊은이라는 사실이었다. 하기야 도굴같이 철지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라면 대개 교육수준이 턱없이 낮거나 정신 병력이 있는 저소득층인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얼마 전 늙어죽은 한 노인의 분묘를 헤집고 사체를 마구잡이로 훼손한 범인이, 앞길이 창창한 어느 엘리트 여성의 짓이라 상상하기란 누구라도 어렵다. 상식선에선 체포는커녕 주요용의선상에도 오르지 않았을 인물이었다. 노인의 묘지 근처에 남몰래 설치돼있던 수십 대의 폐쇄회로가 아니었더라면 실제로 그리 됐을지 모를 일이다.


 피해자는 노환으로 타계한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던 대학교수였다. 이 교수는 한평생을 법학연구에 몰두하다 얼마 전 일선에서 물러나 요양 하던 중, 평소 앓던 지병이 심해져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은퇴한 뒤에도 뭇 교수들이 수시로 자문을 구하러 찾아갈 만큼 저명한 교수였거니와, 비교적 건강했을 당시에는 몇몇 정당에서 스카웃 제의를 해왔을 정도로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사망 당시에는 유명 정치인을 비롯해 학계의 여러 인물들이 이 교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가 하면 직접 빈소를 찾아와 눈물로 애도하기도 했던 것이다. 장례식에는 양가 가족들을 포함해 수백 명의 조문객이 참가했으며 이교수의 시신은 가문의 전통에 따라 고운 삼베옷을 입힌 뒤 부친이 묻힌 선산 어느 양지바른 곳에 매장됐다. 


 그런데 그로부터 겨우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이 사건이 벌어졌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던 노교수가 그런 일의 피해자가 됐다는 사실에 국민들 대부분이 경악해 마지않았다. 더구나 포토라인에 선 피의자 여성이, 도굴된 시신의 행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갈기갈기 찢어 아무렇게나 내다버렸다’는 대답을 내놓으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음은 물론이다.


 하다못해 동기라도 분명했다면 충격이 덜했을는지 모른다. 피해자가 전 법학교수이고, 피의자가 법학전문대학원에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었다. 제각기 재적 중이던 학교 역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던 데다 이렇다 할 학문적 교류도 전무했다. 피의자 주위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탐문조사를 실시하기도 했으나 ‘무척 열심히 공부했던 모범생으로 기억한다’는 것 이외에 원한관계를 추측할만한 증언은 나오지 않았다. 애당초 워낙 평판이 좋았던 이 교수가 누구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도 않았다. 


 재판부는 검찰이 제기한 분묘발굴, 사체손괴 등의 혐의를 인정함으로써 피고인 여성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여자는 사뭇 차분한 표정으로 재판정을 빠져나왔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은 곧장 피고인을 둘러싸더니 질문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여자는 ‘항소계획은 없다. 재판결과를 겸허히 받아 들이겠다’는 말만 짧게 남긴 뒤 호송차량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러나 기자들, 아니, 전 국민이 여자에게 진정 궁금해 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아니! 왜 그래야 했습니까? 이유가 대체 뭡니까?” 한 젊은 기자가 돌연 고함쳤다. 마침내 걸어가던 여자의 발길을 멈춰 세울 만큼 큰 목소리였다. 여자는 몇 초가량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이내 고개를 치켜들고 대답했다.


 “저로선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여자의 얼굴에 플래시 불빛이 쏟아졌다.     


-     


 여자가 아직 소녀였을 때였다. 소녀의 어머니는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교사가 꿈이었던 그녀는 졸업하기 직전 사귀던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했고, 이듬해 소녀를 낳게 되면서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얼떨결에 교사의 꿈은 고꾸라졌지만, 어머니는 소녀를 직접 낳아 기르는 데 큰 보람을 느꼈다. 소녀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훨씬 배우는 속도가 빨랐고, 기본지식을 가르쳐주면 응용에서 심화까지도 척척 해내는 것이 영 기특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 어린아이치곤 학업에 대한 열정도 대단한 수준이어서, 어쩔 때는 집안일하기가 힘들 정도로 어머니를 귀찮게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모든 일들을 제쳐놓고 소녀의 궁금증이 모두 풀릴 때까지 정성을 다해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모두가 잠들어 있던 어느 날 새벽, 어둠을 틈타 강도 하나가 가족이 살던 집에 침입했다. 당시 강도는 은밀히 패물이나 몇 개 훔쳐 달아날 작정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잠에서 깨 화장실에 가던 남편과 마주친 것이다. 뜻밖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강도는 품속의 칼을 꺼내들었고, 몸싸움을 하던 와중에 느닷없이 급소를 찔러버린 것이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강도는 그 길로 도주했다. 남편은 거실에 쓰러진 채 몇 분간 피를 흘리다 죽었다. 겨우 잠에서 깬 아내가 방문을 열고 나왔을 즈음 남편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돼있었다.


 다음날, 사건을 접수한 경찰이 현장 곳곳을 수색했지만, 집안에는 희미한 발자국 이외의 어떤 단서도 남아있지 않았다. 유일한 목격자라고 할 수 있는 아내 역시 ‘잠결에 들었던 낯선 목소리가 이삼십 대의 젊은 남성 같았다’는 추상적 증언밖에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 자신이 유력 용의자로 몰려 남편을 죽인 혐의에 대해 해명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녀 이외의 용의자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경찰은 현장에서 도보로 불과 십 분 떨어진 원룸에 살던 한 남자의 행적을 조사했다. 그 해로 삼십대 후반에 접어들었던 그 남자는 사건 당일의 행적이 묘연했으며, 현장에 남겨진 발자국 모양과 비슷한 밑창의 신발을 갖고 있었다. 또한 최근 카드사로부터 빚 독촉전화에 시달리는 등 금전적인 문제를 겪고 있기도 했다.


 한편 그녀가 그 남자를 범인이라 생각하게 된 가장 핵심적인 증거는 따로 있었다. 경찰서에서 우연히 마주했던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남자는 방문 너머에서 얼핏 들었던 음성과 거의 똑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매일같이 경찰서를 드나들면서 그 남자에 대한 추가수사를 요청했다. 


 얼마지 않아 수색영장이 발부됐고, 남자를 대상으로 한 정식수사가 이뤄졌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비슷한 발자국의 신발을 갖고 있다는 것, 그 신발을 수색영장 발부 전날에 세탁했다는 것이 의심을 사긴 했지만, 당장 현장에는 흉기도 대조할만한 생체증거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경찰은 그녀의 끈질긴 요구에 따라 그동안의 수사기록들을 취합해 담당 검사에게 기소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혐의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그 남자를 법정에 세울 수 있는 어떤 방법이라도……”


 “어머니 말씀은 백번 이해합니다. 남편분을 그렇게 잃고 얼마나 속상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어쩌겠어요? 대한민국에서 기소라는 건 오직 검사밖에 못합니다. 우리야 아무리 그럴듯하다 해서 증거를 갖다 대도 검사가 싫다면 못하는 거에요. 그렇다고 한 사건에다 영원히 수사 인력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저희도 참 안타깝습니다만……”


 그렇게 수사는 종료됐다. 남자는 혐의로부터 벗어났으며, 어머니는 소녀와 단 둘이 남겨지고 말았다. 소녀는 날로 초췌해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곡기를 끊고 야위어가던 어머니가 활기를 되찾은 것은 법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였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는지는 이제와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녀는 학창시절에 들였던 것 이상으로 법학 공부에 공을 들였으며, 딸에게도 ‘이쯤이라도 알고 있어야 나중에 더 힘들어질 일이 없다’는 말과 함께 상식수준의 법을 가르쳤다. 


 그렇게 십사 년 하고도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소녀는 어느덧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이 됐고, 어머니는 자그마한 공부방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던 어느 하루였다. 어머니는 공부방에 매일같이 쌓여가던 폐지며 이면지들을 처분하고자 인근의 고물상을 찾았는데, 공교롭게도 십 수 년 전 자신이 범인으로 의심했던 그 남자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남편을 잃었던 슬픔도 흐르는 시간 속에서 무뎌졌던 걸까? 어머니는 그 남자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저 기억하실는지 모르겠는데……”


 “어우, 당연히 기억하죠. 아가씨는 나이를 거의 안 먹었네요? 하마터면 학생이라고 부를 뻔 했다니까요” 남자가 대답했다. 그새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것이 제법 중장년 같은 인상이 풍겼다. “그래서 저는 알아봤는데, 이렇게 먼저 인사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저에 대한 감정이 안 좋으시잖아요? 아가씨는……”


 “아, 그랬죠. 확실히 그랬었는데. 그동안 저도 공부를 좀 했거든요. 법 공부를 좀 해서……”


 “와, 사법고시 준비하시는 거에요? 아니면 대학에서?”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집에서 조금 독학을 했죠”


 “아아~” 남자는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독학이라구요”


 “네. 깊게는 아니고 그냥 상식 수준으로 공부를 좀 했는데, 공부하다보니 그 때 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증거들로 몰아붙였는지 알겠더라구요. 그때는 제가 감정이 너무 앞서가지고……”


 “에이, 뭘 그런 거 갖고 그러세요? 이제는 잘 끝났잖습니까. 서로 귀찮은 일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그래서 언젠가 만나게 되면 꼭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었어요”


 “뭘, 죄송까지야…… 그러지 마세요” 남자가 멋쩍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래도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아닙니다. 정말 죄송하실 필요 없어요. 사실은 제가 한 게 맞거든요”


 “……네?” 그녀의 머리가 얼어붙었다. “뭐라고요…… 방금?”


 “제가 죽인 게 맞다니까요. 사실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남편분이 좀 발악을 해야 말이죠. 솔직히 저도 억울했어요. 막 거실 들어가서는 뭐 뒤지지도 못했을 때였고”


 “아니…… 당신, 지금 하는 말……” 그녀는 얼어붙은 채 본능적으로 호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휴대폰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처음엔 왜 그랬나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그때 안방으로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남편 분은 뭐 내가 아가씨 강간이나 치려는 줄 알았겠지…… 그러니까 좀 이해가 가기도 했습니다. 그 양반, 아가씨를 정말 아끼고 있었구나 싶었어요. 좋은 양반이었는데. 좋은데 가서 지금쯤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다시, 다시 말해보세요. 지금 뭐라고 했죠?” 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으로 겨우 녹음기능을 켰다. “다시…… 말해주세요”


 “이거 참, 아가씨도 법 공부했다면서 또 이러네. 여기서 이렇게 도청한다고 증거가 되겠습니까?” 남자는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 “거기다 다음 달이면 공소시효도 끝납니다. 나 같은 무식이도 공소시효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요…… 설령 다시 범인으로 몰린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제와서 따져봤자 저는 할 말 없어요”


 “아니! 지금 무슨……” 그녀가 더럭 화를 내며 말했다. “방금 전에 했던 말이랑 다르잖아요! 다시 똑바로 말해보라고요! 방금 했던 말!”


 “쯧쯧, 아직도 포기를 못 하셨네……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그만 가요. 나도 일해야 하니까. 자꾸 이러면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 그렇게 아십쇼”


 남자는 툭 뱉듯이 말하고 나선 고물상 뒤꼍의 사무실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넋이 나간 사람인양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꽤 시간이 지나 폐품을 가득 실은 봉고차 한 대가, 입구를 막고 있는 그녀를 향해 몇 번이나 크낙션을 울릴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어머니는 일주일 넘게 고통으로 울부짖었다. 미친 사람처럼 괴성을 지르는가하면, 거실 구석에 퍼질러 누워 하루 종일 꼼짝도 않고 흐느낄 때도 있었다. 수험생이었던 소녀는 갑작스런 어머니의 기행에 짜증이 치밀었다. 하필이면 미래가 걸린 시험을 목전에 둔 시기였다. 아무리 캐물어도 그럴듯한 이유 하나 말해주지 않는 엄마에게, 소녀는 소리를 지르며 역정을 내기도 했다. 


 “이렇게 방해할 거면 왜 날 길렀던 거야? 차라리 같이 죽어버렸으면 좋았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끝까지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초인적인 인내심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이야 소녀는 영원히 알 길이 없었다.      


-     


 소녀가 무사히 수능시험을 치르고 났을 무렵이었다. 그사이 어머니의 상태는 눈에 띄게 나아졌다. 오랫동안 휴업상태였던 공부방도 운영을 재개했고, 주말에는 그동안 거의 하지 않았던 화장까지 하곤 집을 나섰다. 누굴 만나러 가는지 자세히 묻진 않았다. 다만 ‘법학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선생님’이라는 것 정도만 얼핏 들어 알고 있었다.


 소녀는 시험 결과가 생각 이상으로 좋았던 것보다도, 차츰 어머니가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기쁘게 느껴졌다. 물론 아빠가 그렇게 죽은 건 슬픈 일이다. 그래도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이 도리 아닌가. 엄마도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신 거겠지.


 어머니의 음독자살은 소녀가 그런 생각을 한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사건이었다. 소녀가 학교 친구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거실 소파 바로 아래쪽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다. 


 “엄마, 엄마! 무슨 일이야! 말 좀 해봐!” 불현듯 정신을 차린 소녀는 쓰러져있는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자 엄마의 입에서 짙푸른색의 액체가 새어 나왔다. “이게, 이게 뭐야. 뭘 마신 거야, 엄마?” 


 “……이, 이제 왔구나……” 어머니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어, 엄마…… 농약이야, 이거? 농약이야? 아니지? 응?” 소녀는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몇 번이나 다시 물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어머니는 고개를 조금 움직일 뿐 제대로 된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이윽고 어머니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명백하게 죽음을 향해가는 모습이었다. 그동안 소녀는 구급대에 전화를 걸어, 거의 울다시피 한 목소리로 어머니의 상태를 설명했다. 신고를 받은 구급대원은 ‘지금 막 출발했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엄마, 방금 119에 신고했어. 곧 구급차랑 사람들이 올거야. 다 괜찮아질 거야. 응? 엄마.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줘. 제발……” 소녀가 죽어가는 엄마의 머리를 받아 올리며 말했다. 


 “딸, 우리 딸……”


 “그만, 그만 말해. 무리하면 더 안 좋아질 거야. 응?”


 “아니…… 나는 우리 딸한테…… 할 얘기가 있어. 꼭 해야 하는 얘기야……” 어머니는 그렇게 말을 이어갔다.

 마침내 소녀는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수소문 끝에 법학박사였던 이 교수와 면담하게 된 것, 이 교수가 ‘공소시효가 지났어도 처벌할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고 말해왔던 것, 사건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유인했던 것, 자신의 연구실에서 강제로 성폭행했던 것, 고소하겠다는 어머니를 향해 자신의 법조계 인맥을 거들먹거리며 조롱했던 것, 실제로도 자신이 그 어떤 조치도 할 수 없는 주부라는 것, 그래서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까지.


 “……사랑하는 우리 딸! 아직 못 해준 게 너무 많은데…… 이렇게 떠나게 돼서 엄마가 미안해. 네가 좋아하는 공부도, 일을 관두면 좀 더 가르쳐주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고통이 한결 잦아든 모양이었다. 더 이상의 몸부림 없이, 딸의 무릎에 편하게 머리를 뉘인 채 말을 이어갔다. “기억나니? 니가 한참 어렸을 때…… 내가 한글이며 알파벳 같은 것들부터 차곡차곡 가르쳐주곤 했었는데…… 이제는 우리 딸이 엄마를 가르칠 나이가 됐구나. 우리 딸은 틀림없이 명문대에 들어갈 테니까……”


 “엄마, 더 이상 말하지 마. 제발” 소녀는 울먹거리며 애원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딸한테 부탁하나만 해도 될까? 이런 엄마주제에, 염치없는 거 알지만……”


 “응, 당연하지. 뭐든지 말해. 뭐든지”


 “우리 딸이 이다음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있지…… 엄마가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는지 가르쳐줄래? 마구잡이로 당하고 버려지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 아저씨한테 말이야……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응, 그럴게” 소녀는 대답했다. “꼭 그렇게 할게”          


<공소시효없음>, 2019. 8





Writing  |  Mukdolee 

Painting  |  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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