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망한 브런치 작가다.
내 문장이 퍽 마음에 들었고, 연재일도 꼬박꼬박 지켰다. 세계관도 있었고, 나름의 진심도 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도 읽지 않았다. 조회수는 처참했고, 구독자는 넷. 그중 한 명은 내 동생이었다.
왜일까.
나는 꽤 오래 그 질문을 붙들고 있었다. 알고리즘을 탓하기도 했고, 운이 없었다고 스스로를 달래기도 했다. 그래도 속으로는 조금 억울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건 내 글 속에서 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공감이 서툰 사람이었다. 영화 속 인물에게는 잘 울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비극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며 밤새 마음이 무거웠다. 음악 한 곡에 과몰입해서 며칠을 휘청이기도 했다. 멀리 있고, 추상적이고, 안전한 감정들에는 쉽게 잠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로 옆 사람의 감정 앞에서는 자꾸 딱딱해졌다. 누군가가 속상한 이야기를 꺼내면 나는 늘 ‘바른 소리’를 했다. 공감 대신 충고를, 위로 대신 논리를 건넸다. 나는 솔직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나는 감정을 살피고 바라보는 걸 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것은 심리적 거리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멀리 있는 사건은 나와 직접적으로 얽혀 있지 않다. 감정에 깊이 잠겨도 내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안전하다. 반면 가까운 사람의 감정은 곧 나의 책임과 연결된다. 공감하는 순간 나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 사람이 된다. 그 지점에서 나는 감정보다 통제를 선택해 왔다.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기 전에 생각으로 정리해 버리는 것. 슬픔을 느끼기보다 원인을 설명하고, 상처를 인정하기보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 감정을 경험하기보다 이해하는 쪽을 택하는 습관.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성숙함이라고 믿었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 흔들리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리노를 끌어안고 사랑고백을 하던 평범한 오후.
“리노야, 리노 눈엔 어쩜 은하수가 흐르고 있어?”
나는 문득 멈췄다.
사람 앞에서는 굳어 있던 마음이, 고양이 앞에서는 이상하게 풀렸다. 리노가 창틀에 앉아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기분이 전해졌다. 루나가 괜히 내 다리 위에 몸을 얹고 잠들면, 이유 없이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 글엔 청자가 없었다. 나는 잘 정리된 예쁜 문장을 쓰고 있었지,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말을 쓰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세계를 만들고 있었지만, 정작 그 안에 독자를 초대하지는 않았다. 사랑, 엄마, 열정, 미소, 고양이. 아름다운 단어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나는 꽤 괜찮은 글을 쓴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의 감정 앞에서 잠시 멈추는 일, 해결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함께 있어주는 일. 그걸 나는 자꾸 건너뛰고 있었다.
그래, 내 글에는 공감 없었다.
나는 이미 정리된 사람이었고, 모든 문장을 괜찮아진 사람처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잘 정리된 이야기보다, 아직 흔들리는 이야기에 더 공감할 수밖에 없다는 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시작한다.
일요일 오후 세 시, 고양이들에게 편지를 쓴다.
답장이 오지 않을 존재에게 말을 건네다 보니, 오히려 가장 솔직해졌다. 계산도, 과장도, 증명도 필요 없었다. 그냥 “오늘은 좀 힘들었다”라고 말하면 됐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괜찮다”라고 적으면 됐다.
완벽하게 쓰려던 마음을 내려놓자 문장이 조금 숨을 쉬기 시작했다.
오늘은 비가 왔다. 창밖이 천천히 부풀어 오르고, 촉촉한 공기가 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예전의 나는 이런 날을 예쁘게 묘사했을 것이다. 비, 체리파이, 고양이, 따뜻한 우주. 하지만 오늘은 다르게 적어본다.
그저 다음 비 오는 날에도,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고 그냥 이렇게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