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드리 사과나무

by Cindy in Wonderland

완벽주의자의 웃픈 특징 하나.

계획을 세우는 순간이, 이미 절정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계획표에 반하고,

결국은 그 계획에 지쳐 쓰러진다.


질릴 때까지 리서치를 하고,

질릴 만큼 생각하다, 시작은 영영 오지 않는다.


어찌어찌 시작하더라도, 계획이 하나라도 틀어지면

미련 없이 접고 다시 0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무한 반복.


학교에서의 성적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반복되는 쳇바퀴 속 시험이란 데드라인이

완벽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끝내는 행위’ 자체를 가능하게 해 준 것 같다.

학창 시절 속 '데드라인(deadline)'은 '넘지 못할 최후의 선' 사선(死線)이었다.


문제는 성인이 되어서 나의 계획과 목표를 내가 온전히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시작되었다.

내 수많은 개인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용두사미로 끝났고,

심지어 꼬리조차 없었던 일들도 많았다.


대학교 때 시작한 공예 사업.

매출은 없고 재료값만 나가다 조용히 사라졌다.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몇 달을 못 넘기고 그만두었다.

작심삼일 다이어트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가장 최근엔 컬러리스트와 조향사 자격시험까지 통과했지만, 이마저도 흐지부지.

무려 올해 초의 일이다.

참고로 15년 차 직장인인 나는,

직업을 세 번이나 바꿨다.


돌이켜보면, 나는 무언가를 완료함으로써 성취하기보다는,

완벽한 계획을 세우는 ‘나 자신’에 심취해 있었다.


목표를 위한 계획이 아니라, 계획을 위한 목표.

완벽주의자의 함정이었다.

계획이 틀어진 후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를 만족시킬 또 다른 ‘완벽한 계획’을 짜곤 했다.


그래도 나는 ‘완벽주의자’라는 말이 자랑스러웠다.

그것의 또 다른 이름이 ‘회피주의’, ‘포기주의’라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스티브 잡스의 영혼을 사로잡았다던 엘렌 긴즈버그의 시는 마치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너무 많은 철학/ 너무 많은 주장/ 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공간/ 너무나 부족한 나무
회색 슬레이트 지붕들 아래/ 너무 많은 커피/ 너무 많은 담배 연기/ 너무 많은 종교
너무 많은 욕심/ 너무 많은 양복/ 너무 많은 서류/ 너무 많은 잡지
지하철에 탄 너무 많은 피곤한 얼굴들/ 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사과나무/ 너무나 부족한 잣나무
너무 많은 금속물질/ 너무 많은 비만/ 너무 많은 헛소리/ 하지만 너무나 부족한 침묵


잡스는 이 시를 사랑했다.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자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는 철학으로,

자신만의 미니멀리즘을 완성해 갔다.

초기 애플은 단순하고 직관적인 그의 철학을 고스란히 담았다.

맥시멀리즘에 지친 사람들은 단순함의 아름다움에 열광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그의 상징적인 검소한 옷차림처럼 처럼

선택한 것에는 집요 하리만큼의 완벽을 요구했다.


어쩌면 미니멀리즘은, 모든 것을 잘하고 싶은 사람의 마지막 해법인지도 모른다.


모든 걸 가질 수 없기에, 정말 중요한 단 하나를 고르고

그것만큼은 완벽하게 지켜내고 싶은 마음.

하지만 그 완벽주의는 결국 그를 갉아먹고 파괴했다.

비록 그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비움의 아름다움이라는 유산은 남았다.


정말 중요한 것들


그래서 나는,

정말 중요한 것들을 더 오래 바라보고,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해,

완벽하지 않은 최소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아직은 서툴고 어설퍼도,

내가 선택한 사과나무 한 그루를 천천히 가꾸어 보는 일.

그것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