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자식들이 착하게 살지 않길 바란다. ‘착함’이 좋은 표현인 건 알지만, 긍정적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착하다’라는 말이 가장 자주 쓰이는 곳은 식당이다. 길을 걷다 보면 “착한 식당”, “착한 가격”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여기서 착하다는 건 곧 저렴하다는 뜻이다. 싼 가격에, 이윤을 적게 남기고, 손님에게 이익이 가는 구조. 그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마음 한쪽이 자꾸 불편해진다.
싼 것이 왜 착한 것인가. 우리는 언제부터 가격에 도덕성을 부여하기 시작했을까. 값을 제대로 받는 가게는 ‘덜 착한’ 가게가 되는 걸까.
사전을 펼쳐보면 ‘착하다’의 반대말은 ‘나쁘다’, ‘못되다’ 정도로 나와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현실에서 ‘착하다’의 진짜 반대말은 ‘똑똑하다’에 더 가깝다.
“그 사람 참 착해”라는 말 뒤에는 종종 이런 숨은 문장이 붙어 있다. “그래서 손해도 많이 보고, 싫다는 말도 못 하지.” 착하다는 말은 어느새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하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조용히 넘어가고, 불편해도 웃으며 참아내는 사람을 포장해 부르는 말이 되어 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애초부터 ‘착하다’는 말이 멍청함을 긍정적으로 포장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영어에는 ‘착하다’를 뜻하는 말로 kind, nice, good 같은 단어가 쓰인다. 이 단어들은 이미지가 훨씬 또렷하다. kind는 배려하고, 공감할 줄 알고, 도와줄 줄 아는 사람을 떠올리게 하고, nice는 상대에게 기분 좋은 사람, good은 도덕적으로 옳고, 제대로 된 기준을 지키는 사람을 뜻한다.
이 단어들은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사람’을 잘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보통의 kind한 사람은 동시에 꽤 단호하고, nice한 사람도 필요할 땐 선을 긋고, good한 사람은 불의를 보면 불편해한다. (영어에 대한 제 지식과 생각이 틀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어의 ‘착하다’는 애매하다. 도덕적으로 바르다는 뜻과, 이용당하기 딱 좋은 상태가 한 단어 안에 뒤섞여 있다. 그래서 걱정이 된다. 이 애매한 단어 하나가 이 냉정한 세상에서, 삶의 기준을 흐려놓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착해야지”라는 말 뒤에 “그러니까 참아”, “그러니까 네 몫은 포기해”, “그러니까 시키는 대로 해”라는 압력이 숨어 있는 건 아닌지. 나는 내 아이들이 그런 의미에서의 ‘착한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신 이렇게 살길 바란다. 예의는 지키되, 부당한 일엔 “아니요”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 남에게 상처 주지 않되, 자기 자신을 맨 마지막에 두지 않는 사람, 남을 배려하되, 자기 권리를 알고, 요구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나는 착하지 않다. 적어도, 세상이 요구하는 그 편리한 의미의 ‘착함’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대신 나는 정직하고 싶고, 공정하고 싶고, 타인과 나를 동시에 존중하는 사람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