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세대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최초의 수능세대이며 IMF 구제금융시기에 졸업을 맞았던 나의 또래들에게 직장이란 어떤 의미일까?
98년 이후 복학해 대학에 다니면서 그 이전에 보았던 선배들의 안정적인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던 고용환경이 눈 앞에 생생하다. '갈 곳 없으면 현대라도 가지 뭐' 했던 선배들을 보며 군대를 갔다 왔는데 제대 후에는 아무도 취직할 곳이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취직도 힘들어졌지만 큰 회사도 언제든 망할 수 있고 회사가 어려울 때는 직원을 챙길 수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되어버렸었다. 그리고 이직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도 그 시대를 살아오면서 지금은 세 번째 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난 10년 동안의 세월 동안 경험했던 세 군데의 문화를 비교 정리해보려 한다.
첫 번째 회사는 컴퓨터의 살아있는 역사와 같은 백 년 넘는 역사를 가진 IT회사였다. 사회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던 나는 세계적인 IT 회사인 만큼 많은 기회도 있을 걸로 기대하고 지원했었다. 돌아보면 참 많은 부분이 선진적인 회사였는데 내가 하는 일이 워낙 생명 쪽 내용이다 보니 IT의 역사와 같았던 그 회사에서는 생각보다는 막상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외국계 회사의 한국지사에서 오는 한계가 있었다. 보통 외국 지사는 세일즈 조직만 있지만 그 회사의 경우는 한국에 랩이 있어 새로운 IT솔루션 개발도 진행할 수 있었고 그래서인지 참 잘한다는 분들이 곳곳에 있었다. 하지만 주력사업이 아니고 지사이기까지 한 상황에서 나를 뽑았던 근거가 되는 국제 프로젝트가 갑작스럽게 멈추게 되면서 지사에서 국내를 지원하던 일을 하는 나는 갑자기 할 일이 없게 되어버렸었다. 지금 지나서 생각해보면 그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일의 진행에 군더더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몰랐었다. 급여가 높지는 않고 할 일까지 없어졌던 나는 날마다 이직 생각밖에 하지는 않았었지만 그 이후 회사들을 다니면서 돌아보면 체계가 잘 잡혀있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회사 내에 교육제도 및 멘토제도가 존재했다. 물론 다른 회사들에도 다 있다. 하지만 이름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체계였던 것이 달랐다. 게다가 우리나라 회사에서는 보기 힘든 장인제도가 있어 관리직으로 가던가 기술 장인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DE라고 불리는 최고 수준 기술자 분들은 전 세계의 지사 내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어떤 일을 진행하는데 중간 점검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저 아침부터 저녁까지 프로그램 개발을 하다가 일 년 중 때가 되면 문서화 작업을 하면 되었다.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또 선배들이나 세계의 누군가가 만든 자료는 언제든 검색해서 그 자료를 만든 사람들과 연락해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오너가 없이 운영되는 회사의 극단적인 효율성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결국 회사이기 때문에 매출을 크게 일으킬 수 없으면 좋은 평가받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처럼 특수 프로젝트로 고용된 인력의 경우 갑자기 프로젝트가 끝나면 본사 인력은 돌아가서 다른 일을 하면 되지만 나는 업무를 아예 다른 것부터 배워야 하는 일이 발생을 하였다. 그래서 그때 원하는 일을 계속하고자 하면 지사가 아닌 본사에서 일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두 번째 회사는 국내 대기업 중 하나였다. 그 회사는 본사 연구소를 확대하는 중에 회사의 성장에 기여할 분야를 여러 개 시도하던 중이었고 그래서 나처럼 생명과학을 하면서 IT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대거 채용하던 시기였다. 본사에서 사람을 뽑았으니 뭐든 잘만 하면 될 것 같은 마음에 같이 입사한 동료들과 희망에 가득 차 올라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진행하고 하면서 무척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뽑았다는 것이 그 사업을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 데까지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갔다. 처음에는 윗선 설득이라는 것이 그냥 힘든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처음에 제안했던 프로젝트로 과분한 평가를 받은 다음 해에는 갑자기 왜 프로젝트를 해야 하는지를 증명하는데만 2년의 시간이 필요했고 결국 조 단위의 매출을 일으킬 수 없는 일을 제안한 것이냐며 평가가 거의 꼴등이 되어버리는 일도 격었다. 조직의 평가는 내가 무엇을 했냐가 아니라 윗선이 그 윗선에 어필하기 좋은 것이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롤러코스터 같은 날들을 보냈었다. 물론 회사 내에는 매우 인정받는 분들이 계셨다. 그분들은 회사의 본업과 관련된 연구개발을 하던 분들이었는데 기술을 개발하면 바로 상용화에 연결이 되는 모습이 부러웠다. 마지막으로 5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는 주력사업이 아니라 신규 사업을 시험 삼아하는 곳에서 일할 때 사업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1년을 더 보내다 지금의 회사에서 마침 사람을 뽑아 옮기게 되었다.
세 번째 회사인 이곳의 생활은 참 행복하였다. 가장 좋았던 것은 주변 사람들이 회사의 창립자부터 말단에 있는 사람들까지 DNA라는 말이 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주력사업이 DNA 서열 해독사업인 상황에서 이제 지난 회사에서 왜 해야 하나를 증명하는데만 4년 걸렸던 일을 바로 시작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같은 부문 사람들과 필요한 인증을 준비해나갈 때 복지부에서 우리가 준비하던 바로 그 분야를 병원에서만 가능하게 하는 고시를 내놓았다. 그렇게 일차적으로 사업의 길이 막히고 난 뒤 새로운 사업형태를 찾아냈어야 하는 시간에 우리는 주어진 매출 목표를 채우기 위해 회사의 주력 사업의 형태를 어떻게든 수행해 나갔다. 매출은 점점 늘어났지만 원래 하려던 진짜 사업을 제대로 시작을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매출이 늘수록 고객 클레임은 증가했다. 그것을 처리하다 보면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은 다시 채용해야 하는 상황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3년이 흐르고 있다.
결국 지사가 아닌 본사에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본사에서 일을 해 보았지만 주력 사업이 아니면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증명하느라 시간이 다간다는 생각이 들어 옮겼다. 그리고 옮기고 나서는 결국 신규 사업은 본업과 아무리 유사해도 프로세스가 바뀌지 않으면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현상을 잘 설명해 놓은 크리스텐센의 경영이론이 계속 증명되기만 하는 것을 느끼고 살았다.
여기까지 지나면서 30대 중반이었던 나는 40대 중반이 되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가장 큰 실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회사에 속해서 월급 받으며 안전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라는 생각 한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내 건강은 많이 나빠져서 가끔 회사를 쉬어야 하는 상황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결국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이제 마흔 후반대로 들어가는 이 시점에 마음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말이 길어지는 것은 아직도 확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이제 회사에 퇴사 의사는 밝혔으므로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몸이 아파 회사가 있는 건물 공용 휴게소에서 건물 옥상을 바라보며 누워 미래를 생각해본다. 잘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도저히 알 수는 없는 것이 인생이다. 어쨌든 현실이다. 예측하지 말고 대응하자. 인수인계부터. 그리고 내 몸 건강 회복부터. 나에겐 한 달의 시간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