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던져버려도 괜찮아

by 이달

<소설처럼>의 다니엘 페나크는 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로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를 세 번째로 꼽았다. 그는 "한 권의 소설책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고 던져버릴 만한 무려 36,000가지 이유들이 있다. 이를테면 전에 어디선가 읽어본 듯한 느낌이 있어서, 그다지 주의를 끌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작가가 주장하는 바에 전혀 동조할 수가 없어서, 혹은 닭살이 돋을 만큼 문체가 역겹다거나 반대로 더 이상 읽어나갈 이유를 찾지 못할 만큼 문체가 진부해서라는 둥...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라고 했다. 그래, 서문만 읽고 던져버린 책도 있는데! 왜 자꾸 우린 묻는가? 끝까지 다 읽었어?




나는 두꺼비가 싫다. 필리핀 세부 메트로폴리스 빌리지에 살 때, 두꺼비에 질려 버렸다. 그전까지 나에게 두꺼비는 실체가 없는 동물이었다. 그저 이야기책에 등장해 콩쥐를 도와 구멍 뚫린 독을 막아 미션을 컴플리트 하게 해준다거나, 천적 올빼미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놓이지만 진심으로 따뜻하게 마음을 나눈 끝에 천적 올빼미와 친구가 되는 두꺼비. 그러니까 나에게 두꺼비는 이야기 속에만 있고 내 삶엔 없었다. 그런 두꺼비가, 그것도 수백 마리의 두꺼비가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오는 섬뜩한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두꺼비는 이야기 속 캐릭터 그대로였을 것이다. 은혜를 알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시골에서 나고 자라 학창 시절은 서울 변두리에서 보냈으니 개구리쯤은 흔히 보았다. 그러나 시커먼 두꺼비들이, 핸드볼만 한 두꺼비들이, 그것도 수백 마리를, 서른 중반 아줌마가 아이 셋과 밤마실 중 맞닥 뜨리는 일은 일생 최대의 위기가 되고도 남는다. 메트로폴리스 빌리지로 이사 온 첫날, 밤마실에서 생긴 일이다.

그날 이후, 메트로폴리스에서 아이들과 달빛 아래 밤마실을 다니며 여유로운 전원생활을 하려던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밤마다 울어대며 자신들이 밖에 있다고 알리는 두꺼비떼 때문에, 1년 남짓 살았던 메트로폴리스에서는 밤 산책은 더는 없었다. 물론 그 뒤로 두꺼비가 들어가는 책은 그냥 싫었다. 그렇게 해서 한 출판사에서 나온 두꺼비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책이었다. 두꺼비를 통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도도하게 흐르는 생명의 힘에 대해, 새끼를 위해 어떤 위험도 감수하는 부모의 마음을, 정의를 향해 도도하게 행렬하는 민중의 힘을! 다 소용없다! 두꺼비니까!

웬만하면 어떤 책에서도 장점을 발견하려 애쓰지만, 이렇게 해서 나에게는 예외가 생겼다. 내 생에 두꺼비 책은 없다. 만약 그게 실물과 같다면!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나는 거의 매일 아침, 자동차에 로드킬을 당해 납작하게 압사당한 두꺼비들의 수없는 시체 사이를 피해서 다녀야 했다. 검은 자국으로 알았던 그것들이 죄다 두꺼비의 압사체였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 1년을 그 동네에서 참고 살아야 했던 그 숱한 날들의 기억을 '두꺼비'라는 단어는 좋았던 이야기 속 두꺼비의 기억을 다 지우기에 충분했다.




두꺼비가 등장하는 책을 만나는 것은 마치, 오랫동안 펜팔을 하던 친구를 실제로 만났는데 상상도 못 하였던 사기를 당하고 그 뒤로 그 친구 이름만 들어도 구토 증세를 느끼는 트라우마 증세와 유사한 증세를 보였다. 그러니 나는 두꺼비가 들어간 책은 아예 펼칠 엄두도 안 낸다. 잘 읽던 책도 두꺼비 사진이 나오거나 두꺼비 이야기가 나오면 덮어버렸다. 대략 그 일로부터 5년 가까이 시간이 지나서 목포에 사시는 장재경 선생님을 만나, 그 선생님을 통해 두꺼비의 트라우마를 벗어던질 때까지. 물론 두꺼비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장재경 선생님을 통해 나는 두꺼비를 보면 머리에 자동적으로 떠오르던 모든 나쁜 기억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나는 <사소한 소원만 들어주는 두꺼비>를 읽을 수 있게 됐다.

<사소한 소원만 들어주는 두꺼비> 전금자 글그림, 비룡소

놀랍게도 다시 두꺼비 책을 보게 됐다. 이 경험으로 나는 책을 읽다 말고 던져 버리는 아이들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그러니까 까탈스럽지 않은 독자였던 나는, 이전까지는 책은 집으면 끝까지 읽는 게 당연했던 것이다. 아마도 나와 같은 성향의 독자성을 가진 부모님이라면, 혹은 선생님이라면 아이가 책을 읽다 말고 덮어버리는 것을 쉽게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첫째 아이가 두어 살 때, 책의 몇 장을 넘기고는 책을 덮어버리는 것을 보고 나는 몹시 당황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책은 끝까지 보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느 대목에서건 탁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첫째는 굉장히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취향이 있었던 것이다.

존 로크의 이론대로, 아이를 백지로 이해했던 나는 백지에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아이에게 책을 끝까지 읽어주려고 무척 애를 썼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아이가 좋아하는 인형을 이용하기도 하고! 그야말로 그런 트레이닝이 없었다. 덕분에 콩세알 도서관을 할 때, 어떤 아이와 무릎 독서를 해도 잠시 아이의 마음을 얻는데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지 않으면 화장실에 갔다 뒤처리를 하고 오지 않은 것처럼 찝찝했고 결과가 궁금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기에, 내가 그렇듯 아이들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독서클럽을 할 때, 책을 끝까지 읽지 않고 오는 친구가 있으면 몹시 안타까워했다. 줄거리 토론을 하면서 다른 친구가 말하는 줄거리를 듣고 끝까지 읽은 척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독서클럽을 처음 했을 때, 대략 스무 살 무렵에는 독선적으로 아이들을 나무랐다. 독서클럽에 참여하는 다른 친구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라고 하며. 수업을 준비한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없다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그룹의 독서클럽을 진행하면서 나는 조금씩 아이들 마음을 알아갈 수 있었다.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은 이유를 물어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손쉽게 바빠서가 아니라, 여러 다양한 자신들만의 이유로 책을 거부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두 살이 지나면서부터 자신의 취향이 분명했던 첫째 아이에게 책을 끝까지 읽히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 것은 나에게 큰 훈련이 되었고 내가 두꺼비를 거부했다 다시 만난 것처럼, 아이에게 기회가 되기도 했겠지만 그때 나는 그 모든 것에 앞서 첫째 아이에게 물었어야 한다.

"왜 이 책 별로야? 그래! 그럼, 치워두자."

그렇게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은 아이들도 독서클럽에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다시 읽게 되는 경우도 있고 끝까지 책을 덮는 경우도 있다. 자신들의 이유로 책을 덮었다면 다시 자신들의 이유로 책을 펼칠 때도 있을 거라는 것을 엄마는, 선생님은 믿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그 책은 내 아이의 짝이 아닐지도 모른다.

책이 없던 시대라면 모를까, 이 시대의 강제 결혼이라니!

기꺼이 아이들이 책을 읽다가 덮어버릴 수 있도록 두어보자.

아이가 읽다만 책이 쌓여간다고 걱정하지 말자.

어느 순간 그 아이가 자신의 반려자를 만나듯, 인생 책을 만나는 순간, 책과 사랑에 빠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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