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여유가 없던 나날들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마음속에 글을 쓸 거리가 흘러넘치던 때도 있었는데, 요 근래에는 아무것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바빠서인 건 아니었고 오히려 폭풍처럼 바쁜 시기가 한차례 지나가고 난 직후였다. ‘나 지금 지치고 여유가 없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그렇다는 걸 나는 알고 있으니, 상담을 하면서 나의 뾰족함이 날을 세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새삼스러운 노력을 해야 할 정도였다. 누군가는 지나친 엄격함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내 개인적인 상태가 일에 영향을 주는 건 나에게 너무 무서운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아무리 조심해도 완벽할 수는 없는걸.)
그냥 여유가 없었다. 상념들이 넘쳐났지만 정작 머무를만한 생각은 없었다. 바쁜 것이 한차례 몰아치고나니 정신도 몸도 기운이 빠져서인지 곧바로 심한 감기에 걸렸고, 코를 훌쩍이다 못해 헐어버렸다. 글을 쓰기는커녕 여전히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일들을 하기에도 내 에너지는 충분치가 않았다. 벌써 한 달째 서랍에 담아둔 글이 두 개나 있긴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는 딱히 발행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피곤했던 거지.
나만큼이나 지친 남편과 의기투합하여 급하게 도망치듯 제주도에 와서, 맛있는 것을 먹고 호텔 침대에서 미적거리고 귤을 스무 개쯤 까먹고 한라산을 넘어 해안도로를 달리다 좋아하는 작은 동네 카페에 앉아 구좌 당근으로 만든 당근주스를 마시면서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니 비로소 글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의 공간이 생긴 머릿속에서 드디어 첫 문장이 생겨나고, 다음 문장이 이어졌다.
내년에는 제주도에 한 달 살기를 하러 올까. 그럼 어디에 집을 구하면 좋을까. 그때도 차는 전기차가 좋을 것 같아. 만약 제주도에서 한 달을 살게 되면 브런치에 한 달 사는 이야기를 연재해야지.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하고 낮잠을 자고 점심을 먹고.. 그다음은 뭘 하지? 뭐하긴 그냥 쉬면 되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계획을 나누며 그렇게 마음속의 공간을 찾아갔다.
2019년이 시작된 게 엊그제인 것 같은데 벌써 그 마지막 달이 열흘이나 지나버렸다. 어린 시절 만화 속에서나 보던 (2020 원더 키디를 아시는지...) 2020년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2019년은 나에게는 좀 (많이) 힘들고 버거운 한 해였다. 아직도 또 생각하면 여전히 많이 속상한 일도 있었고, 그 때문인지 몸과 마음이 쫓기듯 바쁘기도 했다.
2020년은 올해보다 낫겠지. 쥐띠해니까 같은 쥐한테는(?) 좀 더 친절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좀 더 나은 다음 해를 기다리면서 마음에 여유가 없는 지금은 그냥 가만히 있고 싶었다. (놀러 제주도에 오면서 일을 해야 한다고 노트북을 굳이 챙겨 온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가끔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되겠죠.
늘 여유 있게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말처럼 몸과 머리와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다. 하지 않으면 뒤쳐질까봐, 내 성장이 멈출까봐, 혹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원치 않는 모습으로 머무르게 될까봐 그렇게 늘 무언가를 하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고, '난 대체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아무도 안 시켰는데!!!' 하면서도 바쁘게 종종거린다. 물론 아무도 안 시켰으니까 (그냥 내가 그러길 원하니까) 이렇게 살고 있긴 하지만, 내가 지친 것도 모르고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무작정 달려가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아주 가끔은 오늘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게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순간순간이 주어지면 참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