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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령아 Jan 28. 2020

믿을 수 없는 이야기 (Unbelievable)

가끔은 현실이 더 소설 같을 때가 있더라구요

여전히 나는 Netflix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고, 굉장한 시리즈를 하나 보았다. 2016년에 퓰리처 상을 수상했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기록한 르포르타주를 거의 그대로 영상으로 옮겨 놓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시리즈의 세부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될 예정이기 때문에, 이 시리즈를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드라마로 보고 싶은 분들은 이 글을 읽지 않으셨으면 한다. (성폭력 사건을 접하고 싶지 않은 분들도 읽지 말아 주세요.)


첫 화를 보면서 많이 불편했다. 불편했다는 표현이 적절할지 아직도 고민이긴 하지만, 별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 시리즈는 총 8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회차는 대략 1시간가량으로 꽤 긴 편이다. 가장 첫 화의 첫 장면에서 이 시리즈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경고 문구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첫 화를 보고 불편한 마음에 실제 사건과 두 명의 저널리스트에 의해 작성된 사건 기록 보고서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시리즈를 다 보고 난 후에는 사건 기록 보고서 원문과 번역본을 모두 읽었고, 관련하여 책이 있어서 (원작: A False Report: A True Story of Rape in America / 번역서: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피해자 없는 범죄, 성폭력 수사 관행 고발 보고서) 책을 모두 (원작과 번역본) 읽었다.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가끔은 현실이 더 거짓 같을 때가 있는 것 같다.


이 시리즈는 첫 번째 피해자인 마리 애들러라는 한 소녀의 사건에서 시작된다. 시리즈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실명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마리만큼은 실명의 일부를 사용했다고 한다. 실제 사건 피해자의 미들 네임이 마리라고. 2008년, 워싱턴 주에 사는 피해자는 자신의 집에서 잠을 자다가 새벽에 강간을 당했고 아침이 되어 그 사실을 경찰에 신고한다. 그리고 마리는 처음 도착한 경찰관을 시작으로 여러 명의 경찰과 심지어 검사를 받으러 갔던 병원의 간호사에게까지 여러 번 반복해서 그 사건에 대해 진술해야 하는 상황을 겪는다. (나도 성폭력 사건 신고 접수에 관해 전문가는 아니지만 관련 업무 교육 및 업무 처리 경험에 따르면) 성폭력 사건은 최초 진술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최대한 녹음과 녹화가 가능한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런 환경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도 피해자에게 같은 내용의 진술을 여러 차례 반복하게 하지 않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추후 기억나는 부분을 더하기 위해 추가 사항을 진술할 수는 있겠으나, 같은 내용에 대해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은 안됨) 피해자가 나름대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기억이 실제와 달라질 수 있고, 트라우마 사건에서 안정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재경험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굉장히 폭력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런 기본적인 사건 처리 절차도 숙지하지 못한 경찰들이 이 사건의 담당자였고, 그 이후로 마리에게 여러 가지 일이 있지만 짧게 말하자면, 마리의 현재 위탁모, 이전의 위탁가정의 위탁모, 그리고 경찰들은 마리의 태도와 행동이 ‘피해자답지 않다’는 것과 반복된 진술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마리가 사건을 거짓으로 꾸며냈다고 몰고 간다. 이건 정말 몰아간다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사건을 담당한 (시리즈의 캐릭터 명으로) 파커 형사는 마리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기 위해 협박과 강요를 한다. 결국 마리는 거짓말을 했다고 인정하고 자신의 진술을 번복하였고 사건은 종결되었으나, 마리는 허위 신고로 기소당한다. 마리는 강간의 피해자인데, 주변 사람들과 경찰에 의해 강간을 허위로 신고한 범죄자가 되었다. (대체 ‘피해자다운 것’은 무엇인가. 피해자는 어떤 행동과 태도로 자신의 ‘피해자 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거지?)


그로부터 3년 후, 2011년에 콜로라도 주에서 한 대학원생이 (엠버)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캐런 듀발로, 성폭력 사건을 여러 차례 다뤄본 경험이 있었다. 이 피해자는 매우 침착하였고 사건이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도 꽤 자세하게 듀발에게 진술한다. (그 장면에서 듀발이 피해자에게 말했던, 강간 사건에는 총 세 곳의 사건 현장이 있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사건 현장, 범인의 몸, 피해자의 몸-) 시리즈에서 파커 형사와 듀발 형사는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부터가 다르다. 두 형사의 성별의 차이도 있을 수 있겠지만, 굳이 이 문제를 성별의 차이로 규정짓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그보다는 ‘얼마나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가’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실제로 이후에 리포트를 읽으니, 파커 형사는 (이 캐릭터의 실제 인물인 그 경찰은) 이전에 성폭력 사건을 처리해 본 경험이 거의 없고 마약 수사 전담반에 오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파커 형사가 있었던 워싱턴 주 린우드 경찰서는 실제로 미국 전체의 성폭력 사건 발생 대비 미해결 된 성폭력 사건의 수보다 4배나 높은 수치의 성폭력 사건이 미해결 처리로 남는 서라고 한다. 뭐 이것이 피해자를 가해자로 몰고 간 것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너 정말 강간당한 게 맞냐고 묻던 파커 형사와 너의 행동에 대해 나에게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듀발 형사의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사건 현장에 범인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어 답답해하면서 집에 돌아온 듀발 형사는 역시 경찰인 남편에게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이야기를 듣던 남편은 범인의 특징에 대해 몇 가지 묻고는 자신이 일하는 서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으니 담당 형사에게 연락해보라고 했고, 그렇게 캐런 듀발 형사와 그레이스 라스무센 형사가 처음 만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범인의 특성으로 동일범이라 추측하고 이들은 공조 수사를 시작한다. 피해자들은 두 명을 포함하여 몇 명이 더 있었고, 나이도 인종도 사는 주도 상황도 모두 달랐으나 전부 다 혼자 사는 여성들이었다. 나중에 사건 기록 보고서의 사진을 보면서 알게 되었는데 시리즈에 나오는 형사 두 명이 실제 형사 두 명과 굉장히 닮았다. 비슷한 인물을 캐스팅한 듯! 그런데 시리즈에서는 일하는 서와 커리어를 서로 바꿔서 캐릭터를 만들었다.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시리즈는 그렇게 2008년 마리의 삶과 2011년 두 형사의 공조 수사를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마리는 허위 신고로 범죄자가 되면서 직장과 집과 가족과 친구를 모두 서서히 잃게 된다. 허위 신고의 합의 과정에서 마리는 시가 요구한 상담을 받게 되는데, 상담사와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 마리가 했던 말이 인상 깊었다. 마리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상담사에게 자신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물었고, 상담사는 누구도 그런 거짓말을 지어내지는 않는다고, 분명 그 안에 진실은 있을 거라고, 자신은 마리 너에 대해서 궁금하다고 답한다. 마리의 사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상담사는 마리를 위로하며 이 일로 혹시 얻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이런 억울한 일이 앞으로 또 발생했을 때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있겠냐고. 그때 마리가 그렇게 말한다. 싸워야 한다고 대답하는 게 정답이겠지만, 자신은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나면 더 빨리, 더 완벽하게 거짓말을 할 거라고. 그런 일이 절대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이라 믿는 것과 맞지 않는 이야기를 들으면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고. 더 빨리, 더 완벽하게 거짓말을 할 거라는 (그래서 더 억울할 일을 키우지 않겠다는) 마리의 말이 마음 아프고 씁쓸했다.


작은 증거들을 끌어모아 마침내 두 형사는 범인을 체포하고, 결국 그 연쇄 강간범은 327년 6개월 형을 받는다. (실제로 받은 형이며, 당연하지만 지금도 수감 중이라고 한다.) 법정에서 가해자가 형을 받기 전, 피해자들이 했던 말들이 참 마음이 아팠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가장 나이가 많았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했던 말이다. 자신의 어떤 행동을 보고 자신을 선택했냐고, 나의 어떤 것이 당신을 자극했냐고, 그게 무엇인지 알면 자신은 그것만 조심하면 되는데 뭔지 알 수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들이 범죄를 불러올 수 있다고 해서 일상적으로 하던 일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마음이 아프다, 슬프다, 씁쓸하다, 화가 난다의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마지막 화를 보면서는 나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났다.


범인이 잡히고 나서 그런 말을 한다. 워싱턴 주에서 처음 강간을 했을 때는 (마리 사건) 처음이라서 증거를 너무 많이 흘리고 왔다고. 자신의 DNA가 사건 현장에 널려있었을 거라고. 그래서 다음 날 경찰이 와서 자신을 잡아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어? 이렇게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네? 괜찮네? 그렇게 점점 더 완벽하게 강간을 할 수 있었다고. 자신 같은 사람들을 잡고 싶다면, 자신들보다 더 앞서 있어야 한다고. 자신들은 똑똑하고 생각을 많이 한다고. 처음 마리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경찰이 마리가 한 진술의 모순을 찾기보다 현장의 증거들을 찾아냈다면, 그래서 범인을 잡았다면 그 이후에 있었던 여러 명의 피해자들이 피해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두 형사가 범인의 집을 수색하면서 마리의 사진을 발견하게 되고, 파커 형사에게 연락을 취해 사건에 대해 알려주면서 파커는 몇 년 전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게 된다. 처음에는 그거 사건 아니라고, 애가 거짓말로 지어낸 거라고, 그래서 우리가 허위 신고로 고소했다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던 파커 형사는 그레이스 형사가 보내 준 마리의 운전교육생 카드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고 얼굴이 굳어진다. 파커 형사는 마리를 찾아가 허위 신고로 인해 마리가 냈던 벌금인 500달러를 돌려주며 자신이 틀렸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더라. 마리는 시를 상대로 고소를 하고 합의금을 받고 그곳을 떠나기 이전에 파커 형사를 찾아가 사과를 요구한다.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힘들게 자라온 자신도 잘못했을 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안다고, 근데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 자신은 누구에게도 사과를 받지 못했다고, 누군가의 인생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었으면 더 많이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말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아마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거다. 다른 어떤 범죄도 왜 네가 조심하지 않았냐, 너 정말 범죄를 당한 것이 맞냐 라고 묻지 않는데 유독 성폭력은 피해자에게 진짜 범죄를 당한 것이 맞는지, 이것이 사건이 맞는지 묻는다. 너 여기서 잘못 말하면 무고죄로 고소당할 수도 있다고 협박하면서. 가해자(용의자)는 그저 “내가 하지 않았다” 혹은 “사랑해서/동의하에 한 것이다”라고만 말하면 되는데, 왜 피해자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애써서 끊임없이 밝혀야 하는 걸까. 마리는 대체 무엇을 잘못한 걸까.


아무 의미가 없고 그것이 피해자들의 삶을 돌려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도 잘 알지만, 그래도 가해자가 300년 이상의 형을 받았을 때 안도했다. 적어도 피해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가해자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가 없으니. 수감되는 순간에도 가해자는 말한다. 자신은 절대 멈출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오기 어렵게 되었다고. 우리나라 성폭력 특별법은 강간에 대해 최소 5년 이상 혹은 무기징역, 13세 미만을 강간한 경우에는 최소 10년 이상 혹은 무기징역으로 규정하고 있다 (죄에 특수 강도가 더해지면 사형도 포함됨). 우리나라도 법적으로 몇 백 년의 형을 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판례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아무도 그렇게 주지 않는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책은 넷플릭스 시리즈보다 좀 더 가해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가해자는 인간적으로 아는 여자, 좋아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부적절한) 욕망을 투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 가해자는 자신과 관계가 없어야, 그 사람을 인간적으로 알지 못해야 (부적절하지만 가해자에게는 최상인) 성적인 욕구가 생기고 그래서 그 도구로 쓸 여성을 찾아 강간을 한 것이다. 철저하게 타인을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할 도구로만 이용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뒤흔들고, 한 사람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고 성적 도구로만 취급했는데, 다른 이의 삶과 인권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는 그런 사람의 인권을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존중해주어야 하는 걸까. 윤리적인 부분과 부딪히는 딜레마일 수는 있겠으나 한번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넷플릭스 시리즈도, 책도, 사건 기록 보고서도 모두 추천하고 싶다. (아래 사건 기록 보고서 원문의 링크를 첨부해두었다.) 세 가지 매체 모두 거의 같은 내용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좋아하는 방식으로 하나만 선택해서 봐도 좋을 것 같다. 다만, 특히 넷플릭스 시리즈는 철저하게 피해자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사건 장면도 피해자의 시각에서 플래시백 형태로 나타난다. 절대 사건을 포르노 화하지 않고, 가해자나 제삼자의 시선으로 다루지 않는다. 제작자들이 얼마나 고심하며 만들었는지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이것이 피해자의 시점에서 공감하는 것을 도와주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보는 동안 너무 괴롭고 힘들기도 하다. 시리즈의 첫 화면에 경고문 (혹은 안내문)으로 나오는 것처럼, 성폭력 사건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거나 이런 사건이 두렵고 무섭다면 보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https://www.propublica.org/article/false-rape-accusations-an-unbelievable-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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