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사진 여행기
이화에 월백하고에서 네시쯤 나왔다.
나의 본가가 있는 청평의 어느 산도 그렇지만 이곳 산속에 있는 숙소 또한 해가 빨리 진다고 하여 서둘러 나오는 길이었다. 장을 미리 봐 두지도 않아서 급히 가까운 농협 하나로마트에 들러 바비큐 할 고기와 햇반, 간식거리를 사들고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로 향했다.
다행히 해가 산 뒤로 넘어가기 전에 도착.
산꼭대기에 있는 이곳에는 토리와 개울이라는 개 두 마리도 함께 살고 있는데, 도착했을 때는 호스트가 자리를 비워서 아이들이 묶여있었고, 그 앞에 길고양이 한 마리가 여유롭게 앉아 우리를 맞아주었다.
가장 낮은 곳은 운교산방, 중간은 우리가 묵은 몽상가의 시골집, 제일 꼭대기는 호스트가 살고 있는 집이고, 사진은 호스트가 살고 있는 집.
언덕 조금 밑으로 숙소가 분리되어 있다.
운교산방과 몽상가의 시골집은 같은 대문(?)을 사용한다.
체크인은 오후 3시, 체크아웃은 오전 11시. 따로 신청해야 하는 조식은 오전 9시에 테라스로 호스트가 직접 가져다주신다. 우리는 조식을 신청했는데 가져다주시는 시간을 몰라 8시부터 깨어 있었다. 물론.. 나 말고 애인이.
몽상가의 시골집으로 우리의 짧은 휴가를 선택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소음에서 멀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애인은 추석 연휴 새벽까지 영화 촬영을 하고 서울에 와 가족들과 명절을 보냈고, 나는 늘 출근하는 일상. 추석에도 본가와 친척 집을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휴식이 절실했다. 그래서 선택한 조용하고 편안한 곳.
또 나는 이 테라스에 반하기도 했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오래 앉아있지는 못했다. 다른 거 하고 노느라 바빴는걸. 아무래도 여름을 막 지나다 보니 죽은 나방이나 벌레가 많기는 했다. 조금 더 정돈되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들고 온 짐들을 내려놓자마자 턴테이블로 달려가 LP를 틀었다. LP는 몇 번 들어본 적은 있지만 직접 전원을 켜고, 판을 올리고, 바늘을 옮겨 소리까지 나게 하는 건 처음이었다. 지지지 직, 쿵쿵하는 소리가 혹여 고장이라도 난 게 아닐까 조심스러웠는데 예전에 DJ들이 삐끼위끼(?)하는 소리 같은 게 설레고도 재밌었다.
첫 음악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OST였는데, 도착하자마자 DSLR을 삼각대에 거치하고 동영상을 찍는데 애인이 엉덩이를 씰룩, 쌜룩 흔들고 나와 장난스럽게 춤을 추는 게 고스란히 찍혔다. 물론 애인을 찍고 싶었고 내가 등장하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는데. 더구나 카메라 앞에서 춤을 추다니....
어쨌든 찍힌 영상을 하루에도 몇 번씩 돌려본다. 그 안의 우리가 참 귀엽다. 들어가자마자 앉아 쉬기도 전에 그렇게 이 집은 우리의 마음에 쏙 들었다.
LP를 틀고 앉아 잠시 휴식. 방 두 개, 크고 넓은 거실 겸 주방으로 이루어진 이 공간은 LP와 책, 그리고 그림으로 꽉 차있다. 어느 누가 와도 마음에 들 것 같은 취향으로 가득한 곳. 호스트가 쓴 책도 있는데 호스트 부부가 취향 때문에 만나게 되었다는 그 앞장의 몇 줄 글이 나에게 참 와 닿았다.
언덕 위로 올라가면 산꼭대기 위의 배추밭이 쫘악- 펼쳐지는데 시야가 탁 트이고 참 좋다. 우리는 별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기대하며 서너 번 정도 늦은 밤까지 언덕을 올랐는데 하늘에 구름이 두껍게 끼어서 결국 보는 것도 실패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토리와 개울이가 따라 나와서 우리가 가는 길의 앞과 뒤를 지켜주었다. 개 두 마리의 동행이 이렇게나 든든하다.
우리는 거실에서 주구장창 놀았고 기타도 치고, 밥도 해 먹고, 본가에서 바리바리 싸준 과일도 잘라와서 먹고, 밀린 일기도 쓰고,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보드게임도 있고 책도 많은데 그것까지 하기에는 하룻밤이 너무 짧다.
다음날 아침, 9시에 조식을 테라스에 가져다주신다. 나는 그때 부스스 일어나서 다른 이가 차려준 밥상을 받아 먹는다. 3년을 혼자 살다 보니 대충 먹는 게 일상이었고, 애인이 놀러 오면 애인과 내가 번갈아 음식을 해 먹기는 했지만 자취 음식이나 간단하게 먹는 음식들이 다 그렇듯 사 와서 데우기만 하거나, 볶거나 하는 간단한 것들 뿐이었는데 호스트가 직접 만든 소고기 뭇국, 가지가 들어간 야채 조림(?), 배추전이 소박하지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평창이 메밀이 유명하다구? 나는 춘천만 유명한 줄 알았지 강원도 자체가 메밀이 유명한지는 몰랐다.. 그래서 그런지 메밀전병이 나왔다.
나 메밀전병 좋아하는데, 가지는 싫어하는데.. 근데 해 주신 게 맛있었다. 그래서 싹싹 먹었다.
아무래도 나, 이제 가지 먹을 수 있나 봐.
가지에도 또 여러 사연(?)이 있는데 그건 나중에 적어봐야지. 아무튼 조식도 든든하게 챙겨주셨다. 배추전 맛있어..
나 쿨쿨 자는 동안 짐 정리랑 청소를 싹 다 끝내 놓은 애인 덕분에, 나는 그냥 씻고 나와서 체크아웃 전에 여유롭게 산책을 할 수 있었다.
밤이 늦은 시간에도 그랬듯이, 오전에 하는 산책에도 토리와 개울이는 달려 나와 우리와 함께 걸었다. 에스코트라기보다 우리를 걸음마다 지켜주는 느낌으로. 개울이는 밖에 잠깐만 나와도 바닥에 엎드려 체력을 보충해야 돌아올 힘이 생기는 나이 많은 검은 개. 토리는 아직 아가라 힘이 넘쳐서 수시로 우리를 따랐다. 개울이가 뒤처지면 우리도 개울이를 기다려 주기는 했지만 결국 개울이는 늘 토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체크아웃할 때는 둘이 또 어딘가 나가서 마지막 인사는 하지 못했다.
빛이 내리는 숲 속을 토리와 개울이 그리고 우리가 함께 걸었다. 어젯밤에 두껍게 드리웠던 구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맑다.
숙소 옆으로 난 오솔길의 오르막을 오르면 이렇게 예쁜 풍경이 펼쳐진다. 강릉의 안반데기보다는 덜 넓은 배추밭이지만 여기도 푸르고 넓다. 산을 이루고 있는 초록색들이 꼭 나무뿐만은 아니라는 걸 나는 안반데기와 이곳 배추밭들을 보면서 알았다. 세상 증말 단순하게 살고 있다. 나는.
체크아웃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둘러보기. LP는 끝까지 들었다. 노라 존스 앨범이 들었던 것 중에 제일 좋아서 두세 번 돌려 들었다. LP 시대에 살지는 않았지만 과거로 끌고 가는 느낌.
여기에 다녀오고 나니 애인과의 만남이 더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진다. 단순하고,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서로의 취향으로 이어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눈 내리는 겨울에, 벽난로 피우러 다시 가야지.
"취향이 왜 중요하냐고요?
그게 바로 당신의 존재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죠.
누구와 함께, 어디서, 무슨 대화를 나누며,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존재 방식......"
-시사IN 과의 인터뷰 중에서, 김경 /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