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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Nov 18. 2019

사랑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못난 버릇이 있다.

                                                                                                                                                                                                                                                                                                                                                                                                                                                          

후려치기에 대해서 글을 쓰다가.. 저장을 안 하고 꺼버려서 다 날아갔는데 다시 써야겠네. 속상한 일도 있고.

불행을 전시하는 게 나를 보는 사람들에게는 마이너스겠지만 나도 해소할 구멍은 있어야지.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이는 "사랑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못난 버릇이 있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말에 백번이고 공감한다. 서른셋이나 먹고서 어린 시절이 나에게 준 영향을 탓하는 것도 우습긴 한데 가치관과 인격형성이 중요한 그 시기에 많은 일들을 겪으면 또, 그게 나 혼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해서.


아빠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부정을 느껴보거나, 남자를 많이 겪어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하고 자라서였는지 나는 상당한 ‘금사빠’였는데, 이성으로서도 아닌 친구로서, 동생으로써 살갑게 대해줬다는 단순한 이유로 좋아하고는 했다. 다행히도 청소년기에는 좋아할 줄만 알았지 연애란 것도 잘 몰랐는데 그 덕에 비뚤어지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도 나는 인간의 다정함에 종종 녹는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회사를 다니느라 나와 동생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외할머니 손에 자랐는데 나는 언젠가부터 할머니에게 학대를 당했다. 언니라는 이유로 동생이 잘못한 것도 내가 혼나야 했고, 효자손으로도 맞고, 옷걸이로도 맞았다. 예전에도 쓴 적이 있는데 그때 당시에 엄마도 내 성격이 변하는 걸 느꼈는지 그 이후에 할머니를 내보냈다고 했다. 아마 그때가 고등학생. 아침식사를 하지 않고 등교하던 나에게 엄마가 언젠가부터 아침밥을 차려줬을때 부터인가. 할머니랑 살 때를 생각해보면 물론 좋았던 날도 있지만 좋았던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오래, 더 진득하게 남아있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지. 좋은 일 보다 나쁜일이 더 오래, 진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나는 여전히 할머니가 원망스럽고, 밉다.


동사무소에서 주는 라면 한 박스를 집으로 가져오는 것도 언제나 나였는데 창피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창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속으로는 누군가 만날까봐 겁내하면서 어깨는 펴고 당당하게 걷는 척 하는. 역시 어린애한테 그런 걸 시키는 것도 안 좋은거지.



왕따를 당한 적은 없지만 함께 다니던 친구들을 제외한 다른 애들은 은근하게 나를 무시했고, 억울하게 무슨 펜을 훔쳤댔나 하는 도둑으로 몰린 적도 있는데 그 애는 내가 좋아했던 애라 더 상처가 컸다. 아니라고도 했는데 그 나이대 애들은 몰아가기에 더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울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참 별 일이 다 있었다. 


친구들과 우르르 벨튀도 하고(나 어릴 땐 다들 그렇게 많이 놀았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나 싶은데 초딩이 다 그렇지..), 자전거도 타고 좋았던 기억이 많은데, 친구라고 할 수 없는 애들의 장난질에 나는 때때로 외롭고 두려웠다. 뭣도 모르는 초딩이 성적 호기심이 생기면 얼마나 나대는지 나는 안다. 어릴 때부터 성교육을 한다 한들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서 나는 가끔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딸이든 아들이든.




이런 결핍이 뭉쳐 만들어 낸 나는 이십 대에 접어들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을 만나왔고 (나는 누굴 먼저 좋아해 본 적도 없었다. 20대에..) 그러면서 자존감도 조금 높아지고, 이제는 찌질 대지 않아도 괜찮구나라는 걸 느꼈다. 남자들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 마음껏 쏘아대고 화낼 수 있었고, 헤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꼭 그 사이에 교묘한 애들이 있다. 그 뱀 같은 애와 헤어지고 4년간 연애를 하지 않았다. 3년을 꼬박 괴로워하고, 1년 동안은 차츰 무너진 나를 되돌렸다.


지금 애인은 정말 모든 고난(?) 끝에 만난 짝꿍이라고 생각하고, 그 친구 덕분에 좀 더 자존감도 회복되고 용기도 얻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쑤시개로 쌓아올린 탑 같은 건 암만 공들여도 살금 불어오는 바람에 무너지기도 하는데 다시 지지대를 만들어주는 건 결국 애인이다. 너무 기대하면 다칠지도 모르겠다만 동백이도 옆에 용식이가 있으니 그렇게 힘을 내는 게 아니겠냐고. 용식이의 존재는 가히 판타지스럽긴 하지만.



나는 칭찬에 약하다. 들어본 적이 별로 없으니 받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외모 칭찬 같은 건 아무래도 잠시뿐이다. 외모 칭찬이 칭찬인 줄도 잘 모르겠고,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와서는 그냥 뻔뻔하게 고맙다고 받아먹긴 하는데 정작 마음은 어쩔 줄 모르겠는 어린아이 그대로다.


몇몇의 사람들이 내 사진을 좋아한다. 내가 찍은 사진은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다고들 하는데 그건 봐주는 사람들의 감정이라.. 아무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꽤 있다. 사진을 올리기 위해 쓰는 짧은 글이 아니라 긴 글을 쓰는 것도 남자친구는 좋아해 준다. 그래서 조금씩 더 잘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며칠 전 촬영을 하게 된 분도 내 사진과 글이 좋아서 결국 블로그 구독을 하기로 하셨다는데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앞에서는 호들갑 떨면서 감사하다고 했는데 진짜 진지한 자리였으면 쪼끔 울었을 지도..



촬영을 마치고 내가 촬영을 했다는 걸 안 엄마가 전화가 와서는 너 사진 못 찍잖아.라고 했다. 말투도 기분 좋아 보이고 하이톤인데 왜 그렇게 얘기를 할까. 잘 했어?라던가, 잘 됐다 하던가 해주면 얼마나 좋아. 순간 마음에서 뭔가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가족이 없으면 정말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결혼한 동생에게 엄마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게 아주 농담만은 아니게 된다. 매 순간 내 안에 박혀있는 것과 싸우는 것도 괴로운데 그런 말까지 들으면 내 존재가 하찮아지는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다고 해야 하나. 


평생을 부정적인 단어 속에서 살면 긍정이 꽃피우는 게 더디고 더디다. 게다가 돈돈하는 집에서 자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사진을 계속 찍고 싶고 그러려면 여러 필요한 것들이 있는데. 선뜻 비용을 들일 수가 없게 되는 거다. 내 사진을 좋아해 주는 사람은 아주아주 소수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나는 조금 더 나를 아껴 줄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이 나를 칭찬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칭찬에 인색하지 말아야지. 마음 다친 적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그렇게 나누다보면 내 척박한 땅도 언젠가 비옥해지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어린시절의 나로부터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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