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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네오 Aug 04. 2021

제주행 실버 클라우드호

절대군주의 강림

일찍 일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여행 가는 날 아침 정도는 그래도 평소와 조금은 달라야 하지만, 내 몸도 아니고 사춘기 호르몬이 막 지배하기 시작한 십 대들을 일으켜 이른 아침 여행을 출발하기 위해서는 소위 우리 딸이 '오박사'라고 부르는(내가 지 맘에 안 드는 말이라도 할라치면 "어~ 오박사는 그렇게 안 하던데??" 요 Gr을 떨어주신다) 문제아 아니 문제 엄마를 전문적으로 카운슬링하시는 어느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책 한 챕터 정도의 전략은 들어가야 평화로운 여행 시작을 맞을 수 있다.


어쨌든 소리 지르는 일 없이 6시 30분 출발! (오박사 땡큐)


언제나 그렇듯 완도행 여행길의 조식은 군산에서 아침 주는 식당 중 꽤나 유명한 소고기무국집, 간식은 그 근처 오래된 빵집의 야채빵과 밀크쉐이크다. 일찍 일어난 여파인지 멀미약의 부작용인지 차에 타자마자 딥 슬립에 빠지신 용가 남매도 무국집에 도착하자마자 놀라운 먹방 실력을 여주신다.


딱! 여기까지가 평화로웠다.


소고기무국을 완탕 하고 일어서려는 찰나 도착한 문자...

시간은 무려 세 시간을 달려 아침 9시 4분...


 

출발하기 전에나 알려주던가. 이 무슨 무미건조한 사과냐.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라니... 심지어 지가 전화할 때까지 내가 건 전화는 받지도 않을뿐더러 맘대로 배편을 취소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무례한 안내를 매너 있게도 표현하고 있다. 완곡하고 세련된 표현에 감탄도 잠시... 멘붕의 파도가 넘실거린다. 풍랑 때문에 배가 운항할 수 없다는 문자와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군산의 높고 푸르고 뜨거운 하늘이 꼭 장난처럼 느껴진다.


집으로 돌아갈까? 완도항이 전화라도 받으면 결정이 쉬울 텐데 문자의 엄포대로 연락도 되질 않는다.


이런 문제를 결정하는 게 나 혼자라면 참 쉽다. 어떤 결정을 하든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선택하면 되고, 그로 인한 손해도 내가 감수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4개의 자아를 가진 객체들이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 최선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지금은 강력한 군주가 통치해야 할 때인 것이다.


"다 시끄러! 따라와!"


판단이 서질 않을  땐 일단 맛있는 거부터 먹자. 우리는 이성을 찾기 위해 이성당으로 걸었다. 밀크쉐이크를 들고 야채빵을 씹으며 늦은 저녁 도착을 예상해 제주시에 잡은 잡은 첫날 숙소 취소가 가능한지 확인하고, 연락이 전혀 안 되는 완도항 대신 목포항에 전화를 걸어 대충 언제까지 배 운항이 중단될 것인지 가늠하며, 여수와 완도 주변 숙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물론 여수발, 김포발 제주항공편을 검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모든 게 한꺼번에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있는 나...


그러하다 내가 바로 그  절대군주다.


하지만 제주여행이 계획된 두 달 전에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절대군주로 군림할 생각과 의지전혀 없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제주행 실버클라우드호를 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도 아니 제주행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제주행에 '배를 타고'라는 선택지가 추진되기까지 모두의 원함과 바램이 조화를 이루는 과정을 지켜보는 나는 지극한 탕평군주였다. 우리 가족 여행에 완도항은 워낙에 익숙한 루트이다. 완도항까지 운전으로 와서 청산도까지 배로 이동하는 일정이 여름휴가 때마다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이 여행 일정에 '뱃시간 약 2시간 추가'라는 옵션으로 여행 경비를 대략 백만 원 절약한다는 게 지난 6월 제주 렌터카 바가지요금 뉴스를 접한 남편의 선택이었다. 남편이 제주 여행을 계획하며 이 옵션을 제안했을 때 나는 굳이 나의 저항 없이 이 옵션을 거절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백만 원이나 절약 가능하다는 남편의 논리에 피곤하다는 희박한 논리로(어차피 운전도 남편이 할 것이므로) 저항할 명분이 없던 나는 영리한 방법으로 거절할 요량으로 신중한 탕평책을 폈다.


"애들 한테 물어봐봐"


애들한테 물어보라고 저항 의사를 아이들한테 미룰 때 나는 그 녀석들도 '조' 태희의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남편의 질문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은 다소 황당했다.



"배를 타면 백만 원이나 절약이 된다고요? 그럼...




.

.

.




저희한테 십만 원씩 주시면 배 타고 갈게요."


이동 중 휴게시간 포함 장장 여섯 시간을 차로 이동해 완도에서 배를 타고 세 시간을 가야 하는 일정을 단 돈 십만 원에 버티겠다는 용가 녀석들의 근검절약 정신도 다소 징할 뿐더러 도대체 왜 제주여행시켜주고, 오성급 호텔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도 모자라 이 녀석들한테 십만 원씩 수익금을 배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남는 장사라는 남편의 콜!에 이 호탕한 '배 타고' 제주 여행은 순조롭게 계획되고 실행되었다. 어린 백성들의 저항에 성립되지 못할 것이란 나의 계략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그럼 그러시던지' 마인드로 뒷짐을 지고 구경한 것이 지금의 기로에 이르게 한 것이다.



완도항을 20km 정도 남겨두었을 때쯤 드디어 친절하신 완도항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풍랑으로 3일 후까지 제주행 배는 운항하지 않는단다. 여수에 머무르며 배를 기다리겠다는 계획은 어린 백성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물론 이 저항은 내가 여수공항에 오늘 출발하는 항공편이 있다는 정보를 흘렸기 때문이다. 삶은 늘 그렇듯 선택의 연속이나 내가 원하는 삶이 채택되기 위해 흘려야 할 정보와 숨겨야 할 정보 정도는 아는 나는 남편의 "어쩔까? 어쩔까?" 앞에 여수발 항공의 가격과 쏘카라는 신문물을 제안해 여수공항으로 출발했다. 이 와중에 검색된 슬픈 가격 김포발 제주행 항공편 7천 원은 물론 숨겨야 할 정보에 해당된다. 물론 내 마음도 아린다. 하지만 당일 검색에 제 때 출발하는 항공편이 딱 나타나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여수공항을 향해 달린다.


"우리는 여수에서 아시아나 항공 여객기 OZ8199 타고 오후 5시에 제주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까지가 끝이다. 그 이후 장장 열흘에 걸친 제주여행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딱 여기까지가 아름답다.

'그 후로도 오래오래 행복했어요.' 로 끝나는 백설공주의 스토리처럼... 명작이 명작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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