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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네오 Aug 04. 2021

독감여행

선우정아 도망가자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도망가자 엄마도 휴가가 필요하니까





우리엄마는 나와 내 여동생이 결혼을 하기 전엔 딸년들은 결혼을 안했으면 좋겠다 하셨다. 그 '딸년'들이

엄마 소망처럼 비혼으로 살지 않고 남친 척척 만나 과년하기 전에 결혼을 하고 나니 이번엔 결혼은 해도 아이는 낳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딸년들이 탈없이 건강하기까지 한 관계로 큰 노력 없이 결혼하자마자 아이 하나씩 들어서니 이번에는 아이는 하나면 충분하다 하셨지만 첫 아이로 사이 좋게 아들 하나씩 낳은 그 '말 안듣는 딸년'들은 기어이 터울 좋은 두 살 차이 딸을 둘째로 만들고 나서야 '셋은 절대 안된다.'는 엄마의 말에 수긍했다.



"엄마는 늘 내 자식 셋 덕분에 행복하다, 감사하다 하시면서 왜 우리한텐 그 행복하고 감사한 일을 그렇게 안해도된다 하지말라 하세요?"


내가 교사로 취직을 했다고 했을 때 그렇게 기뻐하셨던 양반이 아이를 갖고 싶다는 나에게 "고마 그런거는 다 안해도 된다." 고 하셨는지 이제야 절실히 이해한다. 다음의 이야기는 감사하지만 너무나 행복하지만 내 딸년은 이 모든 일들을 피해갔으면 하고 바라시는 울엄마의 바람과 통하는 나의 일기이다.




2018년 12월



12월 17일 월요일 뉴스공장 오프닝 들은 사람은 알 것이다.


김어준도 걸렸다. 독감... 다 죽어가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이 A형 독감에 걸려 어제 오프닝을 쓸 수가 없었다는 변명을 들으며 항상 ‘김어준 생각이었습니다’로 시작하던 그의 오프닝은 평소 자기가 좋아하는 곡이라며 오프닝과 시그널이 꼬이는 말도 안되는 곡으로 시작되었다. 그사이 이미 우면산터널을 통과해 서초동을 달리고 있던 나는 그냥 피식 웃었다. 주진우 기자와 더불어 도대체 공포라는 걸 느낄 줄 모르는 류의 종자라 생각했던 김어준이다. MB의 위협과 횡포에도 겁 없이 “쫄지마 시바”를 외치던 그 조차도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있겠지... 그런 그를 자빠뜨리는 게 고작 A형 독감이구나... 그 용감하던 나의 섹시한 영웅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제가 A형 독감이 걸려서...”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 독감 걸린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들으며 나는 지난 주말 나를 생각한다.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가족여행에 누를 끼칠까봐 네 시간을 달려 영덕까지... 도착해서도 타이레놀 서너 시간 간격으로 두 알씩으로 주말내내 버텨가며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며 달렸던 내 신세가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그의 A형 독감과 내 A형 독감이 다른 질병이 아닐찐데 삶은 우찌 이리 내 앞에서만 펄펄 살아 날뛰는 서슬 퍼런 빚쟁이처럼 내 멱살만 쥐어 잡고 흔들어대는 것일까? 미련하게 병원가지 누가 그러랬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그래 내 팔자 내가 만드는 거지...


맞다 내가 만드는 내 몸의 가치가 이 모양인거다. 아프다 아프다 말만하지 말고 이 조씨들아! 나 진짜 아프다고!! 하고 소리 함 지르고 영덕 보건소나 어디 병원 응급실 찾아 드러누워 버릴걸... 타이레놀 두 알 먹으면 한기는 들어가고 버틸만 해진다며 겨울바다 산책에, 산속 족욕에, 가족 명상까지 쫓아다닌 내 미련함을 누굴 탓하겠는가? 나만 잠자코 있으면 깨지지 않는 이 평화를 깨지 못해 나는 이번 독감 앞에서도 또 호구가 되었다. 아니 사실 독감이라는 병명을 획득한다는 확신만 있었어도 그리 바보짓을 하진 않았을거다. 그냥 난 아이를 낳고 키우며 이정도 아픈 건 그러려니 하고 버텨온거다.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왜 유독 이 가족이라는 집단에서 나는 내 주장을 못하고 맥을 못출까? 전문용어로 이런걸 '물렸다.'라고 한단다. 동네 언니들이 술자리에서 알려준 것 처럼 정말 나도 전생에 업보가 있어 조씨들 한테 '물려'있는 걸까?


어준이 오빠가 독감으로 오프닝도 제대로 못하겠다고 방송하는 날 오후 나는 김어준만큼은 아프지 않은 건줄 알았다. 그러면서 또 문득 지독하게 아프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했다. 전염병이면 더 좋다. 하루라도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방해 받지 않고 아무것도 안하는 호사를 누릴 수만 있다면... 그런 의미에서 독감만한 게 없지 않겠나. 아침에 진통제를 안먹었더니 출근해서도 열이 안떨어진다. 학교에서 쫓겨나 진단을 받으러 가는 내내 진짜 독감이 아니라도 실망하지 말아야지까지만 생각했다. 꼭 눈병 걸려 학교안가고 싶은 초딩처럼... 나에게 그 호사스런 영광이 찾아왔다. 무려 A형... 독감...


 


직장은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며 내가 병원 다녀 온 사이 내 가방과 소지품을 현관문 밖에 내다 놓고 소독약을 잔뜩 뿌려놓았다. 애들에게 전염될 것을 걱정한 신랑은 차라리 입원하는 게 애들 위해서도 낫지 않겠냐며 골방 방문을 걸어잠궈 주었다. 타미플루를 처방받아 먹고, 39도를 오가는 고열통에 골방 문 잠그고 누워있자니 이번 달 가장 큰 쇼핑이었던 알레르망 구스이불이 무색하게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고 눈을 감아도 떠도 방 천장 모서리가 빙글빙글 돈다. 꼭 서울랜드 춤추는 요술집 안에 앉아있는 기분이다. 짜릿한 스릴감이 느껴지는 속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이 상태가 정상적인건 아니라는 건 알겠다. 너무 좋아서 이 아픈 와중에도 이런 호사가 있나 싶다. 방문 밖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아이들과 신랑의 대화소리가 정겹다. 참견하고 싶지만 어차피 나는 심각한 전염성 질병으로 인해 아이들과 차단된 상태...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퇴근해 애들 챙기고 먹이고 정리하고 숙제 시키고 점검하고 씻기고 씻는 동안 이거 갖다 달라 저거 갖다 달라 주문해 대는 애들 시중들다 지나는 세 시간 남짓의 시간 뿐 아니라, 자려고 누워서도 안아달라 등 만져달라 이불 덮어 달라 화장실 따라가 달라 자다가도 들어야 하는 시중에서도 해방이다.


 5일간의 휴식...

비록 눈을 감으면 빙빙도는 춤추는 요술집 같은 방일지언정 진정한 고립을 통해 최근 2~3년 사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완전한 고립을 얻어냈다. 법적으로 허가받은(병원 진단 상으로는) 기한은 5일... 현실적으로는 어려우나 그래도 적어도 3일은 나는 이방에서 나가지 않아도 된다. 신난다. 요즘 누가 가장하고 싶은 여행이 뭐냐고 물으면 고민 없이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포카라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가지고 간 책, 드라마 보며 5일만 혼자! 머무는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지금 내가 얻은 것도 내가 하고싶은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안나푸르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만 감안한다면 거의 100퍼센트 일치하는 나의 로망 여행지이다. 이번 독감여행 동안 드라마는 꼭 ‘나인’을 다시 한 번 섭렵해야겠다. 춥고 어지럽고 졸려 일단은 좀 자둬야겠다. 뭐 어때 고산병도 이 정도는 아프다더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눈을 감는다. 금방 잠들 것 같다.


 

.

.

.




누군가 조심히 나지막히 문을 두드린다.


‘똑똑똑’


“응~ 누구니? 아가야 이 방에 들어오면 안돼. 필요한 거 있으면 아빠한테 가서 부탁해~”


다정하게 노크를 거절하는 내 목소리는 평온하다.


하지만 담담히 들려오는 아들의 대답소리는 내 평정심을 깬다.






“엄마? 나 열나요. 39도예요.”






헛웃음이 나온다.

그래... 그럼 그렇지... 반나절이나마 행복했던 내 독감여행은 출국수속을 끝내고 게이트를 통과해 비즈니스석을 통과해 내 좌석을 확인하고 소박하게 자리에 앉았건만... 애초에 고객님을 위해 준비되었던 여행이 아니라신다.


도망은 어딜 도망가냐. 그래 같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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