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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네오 Aug 11. 2021

옛날 엄마

작명 전문가의 훅 한방




엄마 옛날 엄마야?


여덟 살 딸이 따지듯 묻는다.  응? 이건 또 뭔 소리지? 이 녀석은 아기 때부터 약간 특이한 능력이 있었다. 지단 하고  복잡한 상황이나 사람들의 어떤 행동 패턴을 간결한 말로 정리해 단숨에 기선을 제압해버리는 능력이다. 그게 꼭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말이라는 강력한 프레임에 갇혀버리면 구구절절한 설명은 힘을 잃는다. 이런 건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배운 건데 이놈은 어째서 날 때부터 이런 걸 아는 걸까? 사실 이 녀석한테 걸리면 말싸움에서 이기기가 쉽지 않다.  하여 내가 이 딸놈한테 붙인 별명이 작명 전문가다.



아니~~ 왜 맨날 오빠 편만 들어?


피식 웃음이 났다. 머릿속에 생각이 떠오르면 상대방의 기분을 생각한다거나 상황을 살핀다거나 하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말로 바로 튀어나오고 자기 기분 내키면 크게 다른 사람의 기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거침없는 딸에 비해 상대방의 기분을 너무 살피고 눈치 보고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에 맘 상하기도 잘하는 아들 덕에 둘이 싸웠다 싶으면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늘 이렇다.



오빠가 이유 없이 그랬을 리가 없는데?


언젠가 장윤정 딸과 아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며 한참 웃은 적이 있는데 "아빠 오빠가 때렸어!"라고 외치는 도하영의 절규를 들은 도경완이 요리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우의 변명을 들어 볼 생각도 않고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내가 자주 내뱉던 주대사와 토씨까지 똑같았기 때문이다.


니네 오빠가 이유 없이 그랬을 리가 없는데?

돌전부터 오빠 멱살 잡는 손이 아쥬~ 야무진 우리 까니~♡


사실 그게 맞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딸내미 입장에선 억울할테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옛날 엄마라니... 일단 어디 재방 채널에서 '아들과 딸'이라도 본 건지 아들 딸 차별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아는 게 신기했다.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응 학교에서 선생님이 알려주셨어. 옛날 엄마들은 아들만 좋아했데"


옛날 아주 먼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똘똘이 딸이 귀여워서 웃는 것도 잠시...

나는 딸과의 기싸움에서 또 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옛.날.엄.마.


이 명료한 프레임에 딱 가둬 나를 정의해 버리는 딸의 날 선 공격 앞에 아들의 성향과 이를 대하는 딸의 태도 그리고 그것에 대한 엄마의 입장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나의 논리는 이미 힘을 잃고 비실비실 맥을 못 추고 있다.


오늘도 그 옛날 엄마는 딸한테 진다.


억울한 마음이 한가득이지만 어쩌랴...

우리 엄마보다 훨씬 젊은 나도 아홉 살 딸 앞에선 고정불변의 옛날 사람인 걸...  그나저나 옛날 엄마 프레임이 무서워서 둘의 싸움이 생길 때마다 싸잡아 둘 다 야단치기라도 해야 하나? 아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 암만 봐도 까니는 지 오빠한테 넘 깐죽댄다. 나한테도... 그래서 억울하지만 당분간 옛날 엄마의 오명을 쓰고 살아야 하지 싶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 말고 내가 진짜 옛날 엄마라고 생각하는 그 옛 엄마들도 어쩌면 장황한 설명을 들어주는 이가 없어 억울한 게 있지 않았을까? 하는 슬픈 생각이 든다.

이러 다간 "내 아들 앞길 막지 말라"며 딸자식 등짝을 고무신으로 후려치는 악의 축 같던 그 옛날 엄마를 이해할 날도 오는 게 아닐까? 이게 어른의 길인가 싶다.


드라마 아들과 딸(1992) 옛날엄마의 상징 정혜선 님

진짜 단전에서 분노를 끓어 올리며 보던 드라마였는데... 나더러 옛날엄마라니...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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