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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오네오 Aug 13. 2021

슈퍼맨의 탈피

내 DNA에는 정리 유전자가 없다!




바지 위에 팬티를 입은 것인지 바지보다 팬티가 먼저 까꿍한 것인지 수줍다고 하기엔 너무나 공개적인 장소에 다소곳이 놓여있는 바지와 팬티 세트메뉴에 그냥 픽 웃음이 난다.


범인은 누굴까?

궁금하지도 않다. 가끔씩 내가 우리 집 성씨가 같은 사람들을 묶어 '조 씨들'이라고 표현하긴 하지만 정리 문제에 있어서는 나와 아들이 짝꿍, 남편과 딸이 짝꿍...

이런 장면을 목격할 때 나는 종종 교육적 딜레마를 겪는다. 혼을 내서 이런 짓을 못하게 만들어야 하나 아님 묵인하고 늘 깔끔한 집을 장기적으로 보여주는 게 스스로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것일까? 정답은 오박사 님께 여쭤보기로 하고(단호하지만 온화하게 얘기하라고 하겠지 뭐... )


오늘은 피곤한 화내기를 보류하고 슈퍼맨이 바지 찾아오시기를 기다리며 살포시 즈려밟고 내 갈길을 가기로 결정한다. 슈퍼맨이 오셔서 정리하시길 기대했건만 슈퍼맨님은 다른 바지와 팬티를 주워 입으시고 마치 자기 트레이드 마크인 '바지 위 팬티 슈트'가 보이지 않으시는냥 나와 함께 건너 다니신다. 환장할 노릇...


 가끔 이런 행태에 화를 내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저런 아이들의 행태에 크게 화가 나지는 않는다. 내가 화가 나지 않는 이유가 나의 온화한 성품, 호탕한 성정 때문이라 우기고 싶지만 사실 정확한 이유는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내가 슈퍼맨의 탈피에 화가 나지 않는 이유는 이렇다.


내 DNA에는 정리 유전자가 없다!


보통은 슈퍼맨이 급똥 싸러 간듯한 저 무더기는 아들의 행위이다. 하지만 저 행위가 의식적인 행위인가 무의식적인 행위인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저 무더기가 지 방에 존재했다면 그런 고민을 덜 할 텐데 자리 잡은 위치가 딱! 방과 화장실의 중간, 시간대가 새벽녘인걸 봐선 저 행위는 무의식적 행위에 해당된다고 판단한다. 흡사 내가 발뒤꿈치 각질 관리를 위해 바셀린을 바르고 신은 양말을 자고 있는 사이 나도 모르게 엄지발가락으로 벗어 침대와 벽 사이에 끼워 넣는 행위 같은 것이다. 내가 모르게 내가 한 일을 어떻게 비난하랴...  나는 이 무의식적 행위에 정리 기본 요소가 있느냐 없느냐로 정리 유전자의 존재 여부를 나누기로 한다. 이렇게 아들을 잘 이해하는 이유도 내게 없는 그 정리 유전자가 아들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남편이 세탁을 하려고 빨래통을 정리하며 소리를 질러주신다.


"아들! 바지랑 팬티랑 한꺼번에 벗어서 빨래통에 넣지 말랬잖아!!"


슈퍼맨 슈트를 빨래통에 갖다 놓은 게 나일까 아들일까? 혼은 아들이 나고 있는데 미안한 기운이 밀려드는 걸 보니 아마도 나인가 보다. 아들을 쳐다보며 미안해 않기로 한다. 어차피 니가 갖다 놔도 딱 고렇게 갖다 놨을 거잖아~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만 아주 작게 되뇌인다.


'빨래통에 갖다 놓은 게 어디냐?'


그나저나 화장실 앞 슈퍼맨의 슈트를 보고 이리 긴 사색을 하는 나와 대비되는 남편의 즉각적이고 단호한 분노를 보며 생각한다.


그는 DNA에 정리 유전자가 있나 보다.





남편의 가지런한 장을 이야기하려고 사진을 뒤지다 문득 발견한 슈퍼맨의 슈트 때문에 완전 딴 얘기를 한다. 역시나 이제 남편 욕보단 아들 욕하는 게 자연스러울 나이가 되어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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