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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Jun 12. 2021

가지지 않고 살아가기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는 그대에게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은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 역사는 남들의 경멸에 압박감을 느껴 자신에게도 사랑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텅 빈 선반에 엄청난 것들을 전시하려 했던 사람들이 남긴 유산이기 때문이다. - <불안, 알랭 드 보통>



Be the minimalist

사람들이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고 했다. 그리곤 갑자기 미니멀리즘 - 영어로 하니 뭔가 그럴 듯 보이지만 비워놓고 사는 삶이지 않은가? -이 힙(Hipster)한 삶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떠올랐다. 늘 비워진 채 살아온 내 삶에 미니멀리즘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주변에서 하나둘씩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가장 먼저  일은 집안에 낡은 가구와 가전을 버리는 일이었다. 그리고는 깨끗한 순백색 혹은 아이보리색의 커튼을 치고 햇살이 들어오는  좋은 오후 거실 사진으로 인스타를 장식하며  #미니멀리즘 이라는 태그를 달곤 했다. (커튼을 통해 환하게 들어온 빛으로 가득    거실에 넓은 잎을 가진 커다란 반려식물은 필수라 했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삶이 삶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곤 했다.


일단 미니멀리스트가 되려면 강한 정신력은 필수다.

생활의 편의를 주는 가전제품도 다양하게 그리고 많이 가질 수 없다. 생활 속 궂은일을 대신해 주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를 멀리하려면 그 궂은일을 스스로 해 내겠다는 의지는 필수적이다. 옷은 계절별로 기껏해야 두세 벌 정도만 가져야 하는데 가족과 친구들의 잔소리부터 어쩌다 가끔씩 생기는 드레스코드가 엄격한 자리에 갈 일이 있으면 겪어야 하는 당황스러움과 수고로움은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옷뿐이겠는가? 달랑 운동화 한두 켤레에 구두 하나만으로 장마철을 지내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을뿐더러 가끔은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 원치 않는 폐를 끼치기도 한다. 휴대폰을 한 번 바꾸면 따라서 바뀌는 액세서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일은 매우 매우 강한 정신력을 가져야 하는 일이다.


단순히 생활의 불편함으로 국한된다면 한 번 해볼 만하겠지만, 오래된 구형 핸드폰을 ‘똥폰’이라 부르는 이들과 오래된 차를 ‘썩차’라 칭하는 우리의 삶에서 비우는 삶은 ‘궁색함’으로 오해받기 쉽다. 사치품이라 칭해지는 제품뿐만 아니라 늘 가지고 다니는 핸드폰과 자동차, 입고 다니는 옷 등 소유하고 있는 물건이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풍요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는 세상에서 나 홀로 뒤처지는 사람으로 보이는 삶을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최신의 물건, 필요 이상의 물건은 탐욕스러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가지곤 한다. 그렇기에 비워놓고 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더없이 강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강인한 체력은 옵션이 아닌 필수

걷는다는 것은 두 발을 가진 인간의 특권이라 아무리 주장해도 걷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멀지 않은 거리는 걸어 다닌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멀지 않은 거리’라는 문과스러운 말이 얼마나 많은 차이를 가질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나에게 멀지 않은 거리는 왕복 5km 정도이다. 간단하게 책을 반납한다거나, 빵을 사러 나간다거나, 가끔은 포장된 치킨을 받아오기 위해서 5km 정도는 당연히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에 열광하는 나의 친구는 200m 떨어진 옆 아파트 단지를 가는데 차를 가지고 가곤 한다. 미니멀리스트로 살기 위해선 많은 일을 스스로 해야 하고, 때로는 불편한 상태로 해야 할 때도 있다. 더운 여름 달랑 하나 있는 청바지를 입고 땡볕을 걷는 건 수고로움을 넘어선 불편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단조로움을 즐길 줄 아는 마인드는 옵션

생활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려고 움직이면 한동안은 수없이 필요 없을 거라 생각하는 물건을 버리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그리고는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미니멀리즘적인 삶을 살기 위한 혹은 그러한 삶으로 보이기 위한 아이템을 구매하는데 시간을 보내며 다시 물건이 하나씩 채워진다. 물론 변명의 여지는 있다. 이제까지는 용도별로 물건을 갖춰왔다면 지금부터는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니… 어쨌건 그렇게 미니멀리즘을 표방할만한 외적인 요건을 갖춘 후부터는 단조로움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미니멀리스트스러운 삶을 추구한다면 모르겠지만 미니멀리스트로 살아가려면 삶을 단조롭게 만드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다. 삶의 모습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미니멀하게 만들어야 결국 진짜 미니멀한 삶이 완성된다. 단조로운 삶에 대해서 쓸 거리가 많지만 3개월간의 단조로운 생활을 체험 후 돌아선 한 분의 말으로 대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석 달 동안 이렇게 살았더니 할 이야기도 없고, 인스타에 올릴 사진도 없고, 어제가 오늘 같아.”



So what?

그래서 미니멀리스트는 죄다 보여주기 위한 것인고, 하기 어려우니 하지 말자고? 아니다. 미니멀한 삶은 추구하는 것과 어디까지가 미니멀한 삶인가는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다. 바로 옆 편의점에 가기 위해 차를 타고 가는 친구도 미니멀한 삶을 꿈꾸고, 석 달 간의 고행(?)을 끝낸 후 보복 소비를 하여 후회하던 이도 여전히 미니멀한 삶을 동경하고 있다. 삶이 피 튀기는 정글인데 혼자 비누냄새 풍기며 티끌 하나 묻히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가 좀 튀고 벌레들이 얼굴에 달라붙어 성가시게 굴고 가끔은 다른 동물들과 생존경쟁을 벌이면서도 비워보겠다고 꿈이라도 꿔보는 것, 하루라도 쓸모없는 물건 정리해 보는 것, 그렇게 조금씩 미니멀리스트가 되어가는 것뿐이다.


단조로움에 익숙하되 인간관계는 풍성하게 가져야 하고, 단조로운 삶 속에서 다채로움을 만들어야 하기에 하루아침에 집안에 있는 물건을 내다 버린다고 미니멀리스트가 되지는 않는다. 애초에 맥시멀리스트로서의 삶이 더욱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애덤 스미스가 이야기했듯 이러한 이들의 사치품 소비에 의해 경제적 진보를 가져오는 것도 사실이다.  


햇살이 들어오는 텅 빈 거실에  권의 책을 곁에 두고 앉아있는 이미지에 현혹되어 내일 당장 미니멀한 삶을 살겠다며 ‘합리적 버림 행하는 대신 앞으로의 소비를 줄여가며 감정적인 상처를 감당할  있는지 느껴보길 바란다.  상처를 감당할  있다면 당신은 미니멀리스트로서    다가선 것이다. 그렇게  걸음씩 미니멀리스트가 되어 가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은 경계를 넘어서면 얻어지는 것이 아닌  자체가 과정이다.  과정을 즐길  있어야 미니멀한 삶을 즐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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