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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Jun 19. 2021

왜 행복하지 않냐고?

내가, 당신이, 어쩌면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

“타인에 의한 동감, 호의, 승인 속에서 관찰, 주의, 주목받는 것이 바로 부유함에서 우리가 도출할 수 있는 전적인 이익이다.
안락이나 기쁨 때문이 아니라 허영심이 우리로 하여금 부유함에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그러나 허영심이란 항상 우리가 이웃의 주목과 승인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부유함이 자연히 세간의 주목을 끌고, 또한 부유함의 우위가 그에게 고취한 모든 유쾌한 감정에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을 느끼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은 그의 부를 자랑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 그의 가슴은 뿌듯해지고 터질 듯 부풀게 되며,
그는 부유함이 수반하는 모든 다른 이익보다도 바로 이 점 때문에 자신의 부에 더욱 애착을 갖게 된다.”
-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50~51쪽



I. 감정의 형벌

어느 순간부터인가 부유함은 행복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모두들 지금의 행복하지 않음은 부유함을 쟁취하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하고 더 행복해지기 위해 부를 향해 달린다.

대부분의 뉴스와 이야기의 주제는 부유해질 수 있는 방법과 부유해진 이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예전에는 인간은 부와 명예를 가지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건만, 이제는 ‘부’가 ‘명예’를 앞질러버렸다.


예전에는 가난이나 부족함은 물질적인 형벌에 불과했었다. 가난과 부족으로 인한 불편함과 어려움이 나의 존엄을 해치지 않았다.

그래서 가난이나 부족함을 기꺼이 감수하고 다른 가치를 쫒으며 살아갈 수 있었고, 그러한 선택이 존중받기도 했다.

하지만 속물적인 사회에서는 가난이나 부족함은 배고픔과 같은 물질적인 형벌에 더해 무시와 핍박, 외면이라는 감정적인 형벌까지 가해진다.

부유함, 최소한 가난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상징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끊임없는 형벌을 받곤 한다.


배고픔으로 대표되는 물질적 형벌과 무시와 핍박, 외면으로 대표되는 감정적 형벌의 고통을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속성을 들여다본다면 감정적 형벌의 고통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가끔씩 더 높은 가치와 성취를 위해 스스로 물질적 형벌을 감수하는 이들을 볼 수 있고, 그들에게 찬사와 영광을 바친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 수천 미터 높이의 산을 정복하려 떠나는 산악인들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배고픔과 고됨을 겪어내야 한다.

전쟁터에서 빗발치는 총알과 위험 속에서도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들 또한 안락함 대신 신념을 위한 물질적 형벌을 감수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존경받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신념의 가치를 알기에 물질적인 형벌을 기꺼이 감수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물질의 형벌보다 감정의 형벌을 더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감정의 형벌을 피하기 위해 부유해지고자 한다.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처 받지 않기 위해…


II. 소유

부유함을 논할 때면 으레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한 발짝만 물러서서 바라본다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부유하다고 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163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튤립이 큰 인기를 끌었고, 튤립에 대한 사재기 현상까지 벌어졌다.

꽃이 피지 않았는데 미래 어느 시점을 정해 특정한 가격에 매매한다는 계약을 사고파는 선물거래까지 등장했고,

1630년대 중반에는 뿌리 하나가 8만 7000유로(약 1억 6000만 원)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 누구도 1억이 넘는 돈을 지불하고 튤립을 소유하려 들지 않겠지만,

1630년대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고 튤립의 소유는 곧 부유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부유함이란, 단지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닌 타인이 선망하고 갈망하는 것을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에게나 평생을 원 없이 쓸 수 있을 만큼 지천에 널린 공기를 가지고 다투지 않지 않는가?

오늘 숨차게 뛰어 더 많은 숨을 들이쉰다고 해서, 물속에서 들어가기 위해 더 많이 숨을 참는다고 해서,

누구도 관심을 가지거나 부러워하지 않는다.


타인의 욕망을 소유하는 것을 우리는 부유함이라 하고, 이러한 부유함이 전제되어야 ‘행복’이라는 감정에 한 발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부유함을 이루지 못했을 때 우리는 중간지대에 서 있을 수 있는 것 아닌 감정의 형벌이라는 페널티를 받는 곳으로 내몰린다고 생각한다.

감정의 승인과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부유함과 무시와 핍박, 외면이라는 감정의 형벌을 감수해야 하는 가난 혹은 부유하지 않음이라는 양자택일의 위치를 강요당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형벌을 피하기 위해 부유함을 쫒을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III. 행복

부유함은 타인들의 존중과 동의, 승인을 가져오기 때문에 우리는 필요 이상의 부를 추구한다는 애덤 스미스의 통찰력은 30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빛을 발하고 있다.

그리고 행복함의 원천, 부유함을 추구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타인의 존중과 공감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다.

‘왜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부유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타인의 존중과 공감의 부재’였던 것이다.


행복해 지기 위한다면 ‘부유함’이라는 길을 통해 타인의 존중과 공감을 얻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은 명확하게 보이고, 물질적으로 증명이 가능하다.

그래서 더 쉽게 보여지고, 더 빨리 퍼지고, 더 많이 이해한다.

이러한 속성으로 많은 이들이 눈에 보이고 확실한 부유함만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 생각하곤 한다.


행복이라는 감정이 ‘타인의 존중과 공감’에 근거하고 있다면 부유함이 아니더라도 이를 수 있는 길이 여럿 있을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려면 최소한의 부를 축적해야 하지만, 부유함을 위해 더 큰 가치를 희생하는 것이 필요한지는 고민해 보아야 한다.

감정적인 형벌을 받고 싶지 않지만,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피할 수 없는 감정적 형벌을 어디까지 감수할 것인지도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 고민의 끝에 어디까지 달려가야 할지, 어디서 멈추어야 할지 가늠할 수 있다.


감정의 형벌과, 타인의 공감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룰 만큼의 지점은 자신만이 알아낼 수 있다.

그 지점을 넘어선다고 100% 행복하거나, 그 지점에 도달하지 못해서 100% 불행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평생 달려도 100%의 행복은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앞으로 얻을지도 모르는 100%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50%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소유욕이 나쁜 것은 아니다.
소유욕은 일을 하고 돈을 벌도록 종용한다.
그 돈에 의해 사람은 풍족한 생활을 누릴 뿐 아니라 인간적인 자유와 자립까지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소유욕이 정도를 넘게 되면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기 시작한다.
더 많은 돈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능력을 소모하는 나날이 시작된다.
소유욕은 휴식마저도 앗아가고, 그 사람을 완전히 구송한다.
내면의 풍요로움, 정신적인 행복, 고귀한 이상과 같이 인간에게 소중한 것들은 완전히 무시되어 버린다.
그리고 끝내 물질적인 면에서는 풍족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매우 빈곤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느덧 소유욕이 자신을 지배하려 하지는 않는지 항상 경계해야 한다.

- 니체 <방랑자와 그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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