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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Dec 08. 2020

노력의 배신


오늘도 많은 이들이 노력으로 위안을 찾는다.

불안하게 버티고 있는 현재를 보내기 위해, 더 큰 버팀이 필요한 미래를 위해 노력이라는 말에 모든 것을 녹여버린다. 필요한 것은 노력이 아니라 성과임을 알고 있으나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지금 쏟아붓는 노력뿐이기에 성과는 노력의 결과이며, 노력은 성과를 동반한다는 맹신을 쫓는다.


삶이라는 것은 노력한다고 더 나은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애써 부정하려 한다. 노력은 나의 몫이고 나의 의지로 가능한 것이지만 성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취할 수밖에 없는 몸부림이다.


당신의 노력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노력이 성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음을, 노력하였으나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그것이 당신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음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지는 ‘부유함’은 노력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수천 년 전 수렵, 채집 사회에서는 노력은 곧장 성과로 보일 확률이 높았다. 더 멀리 더 많이 노력을 기울일수록 더 많은 사냥감을 포획할 수 있었고 더 많은 먹을거리를 채집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인간들이 정착 생활을 시작한 농경사회에서도 이러한 노력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타인보다 더 일찍 일어나 더 많은 노동을 투입하면 더 많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들의 삶에서 노력과 성과의 겹침의 농도가 옅어지고 있다.


자본을 집적하여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현실로 만들어 내고, 급변하는 세상의 시류를 타고 어마어마한 명예와 권력을 움켜잡는 이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수년간의 노력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은 시류에 뒤쳐져 그대로 사장되어 버리는데, 노력이나 의도 없이 취득한 부동산이나 주식과 같은 재화는 그 가치가 수십, 수백 배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안타깝지만 노력보다는 다른 요소가 더 필요한 (최소한 노력만으로 도는 성과를 내기 어려운) 세상이 도래했다. ‘우공이산’보다는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더 현실성 있는 사자성어가 되어버린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핏속에는 노력이 성과를 가져온다는 유전자가 각인되어 있고, 불안한 삶을 버텨내고 있다는 스스로의 징표로 ‘노력’이라는 삶의 기둥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 기둥이 삶의 천장을 지지하지 못할 지라도...

부정하고 싶지만 노력이라는 진리의 기둥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노력과 성공의 인과관계가 옅어질수록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믿는 자들과 노력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믿는 자들 간의 간극은 넓어져만 간다. 노력으로 성공한 이들은 노력하지 않아 성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성공하지 못한 이들 = 노력하지 않은 자라는 낙인을 찍어 내려다보려 한다. 노력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은 성공한 이들은 모두 외적인 요소(환경, 운 등)로 성공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우연하게 얻은 성공을 노력으로 포장한 이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게 된다.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가치들은 희석되었고,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가치들을 좇는 현실 세계에서 과연 '노력하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노력'에 꼭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인지조차 헛갈린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여전히 노력의 가치가 살아있다고 믿고 있다.

헛된 믿음일지라도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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