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중국 당나라 말기 임제 의현 선사의 법어를 모은 임제록에 나오는 구절이다.
문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살벌한 말이지만, 속 뜻은 타인들이 가진 가치체계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만의 가치를 세우라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심지어 독실한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경전 내용이 비유와 상징이 아닌 사실을 기록했다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중세에서 근대를 거치면서 신의 존재가 차지하고 있던 가치와 진리의 자리는 과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신에 의해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다.
과학이 진리의 기준으로 자리 잡아 버린 것이다.
과학은 인간을 낡은 신학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지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주지 않았다. 인간들은 과학에 의존하여야만 진리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 버린 것이다. 과학 역시 새로운 형태의 신학인 것이다.
결국 과학이라 불리는 다른 신앙이 우리의 가치 체계를 점유한 것이다.
대부분 우리의 삶은 늘 바깥에서 가치의 기준을 두고 그것에 복종한다.
니체가 뛰어나와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 지 수백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인간은 자기 가치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바깥의 가치체계에 의존하는 노예의 삶을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먼 옛날 임제 선사부터 니체까지 수많은 선구자들이 목소리 높여 자신만의 가치 기준을 만들라 하는데도 왜 여전히 바깥의 가치 체계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인간들은 자신만의 가치를 세운다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는가?
고민하지 않는다면, 치열하게 스스로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스스로 좋음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다.
스스로 좋음이 무엇인지, 자신만의 가치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모른다면 누군가 만들어 놓은, 다른 이들이 따르는 가치 기준을 믿고 떠받드는 삶을 살게 된다.
그들에게 믿고 있던 가치가 무너졌다고 말하고, 보여주어도 그들은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를 찾기보다는 또 다른 바깥의 가치를 찾으려 할 것이다.
삶을 지휘하고 지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가치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그것에 따라 세상에 가치를 부여한다.
삶에 쫓기고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바깥의 가치에 의존하여 살아가기 때문에 타인의 평가와 외부의 가치에 휘둘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바깥의 가치체계가 자신들에게 부여하지 않은 가치에 대해서는 어떠한 가치도 스스로 부여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스스로 가치의 기준을 정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치 평가의 기준이 되고 그 기준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눈다. 이들은 개개인의 나쁜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며 자신에 대한 좋은 것들을 남기고 그것을 자신들의 가치로 삼는다.
반면 바깥의 가치체계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비난이나 평가로부터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것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나쁜 것이라 생각한다. 이들은 바깥의 가치체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바깥의 가치체계에 맞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규칙을 정하려 한다.
예를 들면 전자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와 같은 도덕규범은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적을 속이는 방법 중 하나로 상황에 따라 좋은 덕목이라 인식하는 반면 후자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선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절대불변의 것으로 규정하려는 노력을 한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생명을 빼앗았던 수많은 전쟁들의 대부분이 좋음과 나쁨을 구분할 보편적인 기준이 없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의지하는 가치체계가 옳다고 믿는 강박에서 나온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거의 모든 전쟁은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고 자신을 '선'으로 규정하는 잘못된 가치판단이 부딪혀 발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바깥의 가치에 의존하여 살아가게 되면 어느덧 '판단'이라는 행위를 포기하는 지점에 다다른다.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 이들에게 복종은 편안하고 익숙한 일이 된다.
현재의 편안하고 익숙한 바깥의 가치체계를 부숴버리려는 존재는 불안하고 폭력적으로 자신의 삶을 위협한다고 느낀다.
판단을 멈춘 집단은 전체주의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이들에겐 판단을 대신해 주고 명확한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자유를 억압당하거나 이웃이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선한 것으로 믿고 행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가치체계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무척이나 고단한 작업이다.
세상의 모든 일을 고민하고 치열하게 들여봐야 하는 고된 일이다.
그래서 판단을 멈추고 바깥의 가치 체계에 복종하겠다는 유혹에 더 쉽게 넘어가는 것이다.
세상에 노출되는 수많은 삶, SNS로 들여다보는 타인의 삶 속에서 가치 체계를 찾아가는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타인에게 줄 것이 있어, 혹은 자신에게 넘쳐나는 것이 있어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 타인의 삶을 동경하기 위해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바깥의 가치 체계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좋은 관계는 서로의 관계에서 더 높은 가치가 창조되어야 한다.
관계 속에서 서로의 능력이 확장되고 정신이 고양되어야 좋은 관계라 할 수 있다.
나를 따르는 이들(Follower)을 모으는 것에는 항상 주변의 평가에 귀 기울이고, 그들과 결탁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Follower를 모음으로 자신과 다른 가치 체계를 믿고 의지하는 이들을 배척하게 되는 것이 Follower를 모으는 것의 위험이다.
스스로의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나를 따르는 이들(Follower)가 아니라 나를 파괴할 수 있는 친구(Friend)가 필요한 것이다. 임제 선사가 우상을 사랑하려면 우상을 파괴하라고 일갈했듯,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천명했듯, 나를 세우기 위해서는 나를 파괴할 수 있는 벗이 필요하다.
창조하는 자가 찾고 있는 것은 친구다.
무리나 추종자가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더불어 창조할 자.
새로운 가치를 새로운 판에 써넣을 친구를 찾는다.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듯이 우리도 친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