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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Nov 13. 2020

삶을 뒤집는 앎, 앎으로 바꾸는 삶

삶이 뒤집히는 앎이 있다.

이러한 '앎'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첫 번째 삶을 바꾼 앎 - 과학

페르마의 최단시간의 원리를 처음 접했을 때, 그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이 원리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프랑스 수학자 페르마(Pierre de Fermat)가 발견한 것으로 공간의 두 점 사이를 지나는 빛은 통과하는 데 최소의 시간이 걸리는 경로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즉 빛은 최단 거리가 아닌 최소 시간이 걸리는 경로로 이동한다는 것이 빛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왜 놀라운지 설명을 덧붙이자면 빛이 어딘가로 이동할 때는 최단시간이 걸리는 경로를 선택하여 이동을 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인데 가장 짧은 시간이 걸리는 경로를 선택한다는 이야기는 출발 시에 어디가 목적지인지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빛을 어디로 향하여 비추든 빛은 살아있는 생명처럼, 미래를 예측하여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선택한다.


빛이 이미 어디로 갈지 알고 있다니? 어디로 비출지 그 빛을 보낼 인간들도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데 이미 빛은 자신이 어디로 갈지 알고 있다는 말인가?


빛이라는 존재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이다. 17세기 뉴턴에 의해 입자로 규정되었던 빛은 그 유명한 이중슬릿 실험을 통해 19세기에 이르러 파장으로 규정되었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아인슈타인이 광전효과를 증명하면서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성질을 모두 가질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참고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노벨상은 바로 이 광전효과를 증명해 낸 업적을 인정받아 수상한 것이다. 만약 아인슈타인이 아닌 다른 과학자가 발견했다면 이것만으로도 20세기 최고 과학자 타이틀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업적이다. 이 발견으로 양자역학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뉴턴 물리학 이후 과학계의 양대 산맥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모두를 세운 것이다. (그는 진정한 위대한 과학자다.)



두 번째 삶을 바꾼 앎 - 문학

25년 전 발행된 계몽사의 ‘우리 시대의 한국문학’을 손에 쥐어 들고 땡볕이 작열하는 어느 오후 분수가에 앉아 절반의 시선은 아이들에게, 절반의 시선은 책을 향하고 있었다. 그림자를 뭉개버릴 기세로 머리 꼭대기에 서 있는 태양은 세상을 녹일 듯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끝없이 바닥에서 치솟아 올라오는 분수는 태양을 향해 높이 솟아올랐다가 찬란한 물보라로 화해 흩어졌고, 아이들은 그 흩어지는 물보라 속에서 태양의 열기를 잊고 있었다.


뜨거움에 견디지 못해 비질비질 스며 나오다가 방울져 떨어지는 땀방울에 짜증스러움이 치밀어 오를 무렵 건성으로 넘겨보던 책장 위에 펼쳐진 것은 김춘수 시인의 분수라는 시였다.


1

발돋움하는 발돋움하는 너의 자세(姿勢)는

왜 이렇게

두 쪽으로 갈라져서 떨어져야 하는가,


그리움으로 하여

왜 너는 이렇게

산산히 부서져서 흩어져야 하는가.


 2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네가 네 스스로에 보내는

이별(離別)의

이 안타까운 눈짓만을 가져야 하는가.


 3

왜 너는

다른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떨어져서 부서진 무수한 네가


왜 이런

선연한 무지개로

다시 솟아야만 하는가,

-분수(噴水), 김춘수


하루에도 수백, 수천 단어를 주억거리고 주절거리는  단어들인데, 시인의 손을 거쳐 쌓아 올려지면서 한 편의 시가 되어버렸다.


나 또한 눈 앞에 분수를 두고 있었건만, 같은 대상을 바라봄에도 같은 시상을 얻을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의 시는 반복과 변용이 절묘하게 어우러졌고, 기초적인 낱말들을 모아 단정하고 단단한 시를 만들어냈다.


읽고 또 읽었다. 곱씹어 읽고 베껴쓰기를 반복했다. 시는 작다. 작기 때문에 내면에 모든 시인의 세계를 빽빽하게 채워 넣어야 한다. 빽빽하게 채우기 위해 시는 정교해질 수밖에 없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시는 작기 때문에 잉여를 허하지 않는다. 작은 시의 공간에 분수를 이 이상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좌절감을 통감했다.


여전히 이육사 시인의 ‘광야’를 가장 좋아한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내 삶을 흔들어제낀 시가 있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김춘수 시인의 ‘분수’라 할 것이다.



새로운 앎 이후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더 이상 빛은 당연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었고, 집 앞 분수는 물을 뿜어내는 기계가 아니었다.


빛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된 이후 한동안 과학서적을 쌓아두고 탐독했다. 천재들이 수세기 쌓아온 업적을 곁눈질하고 귀동냥이라도 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알면 알 수록 과학을 넘어선 철학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실험과 증명이 아닌 사유가 필요해졌다.


분수를 읽은 그날 밤, 몇 번을 필사했는지 모른다. 하얀 A4지에 까맣게 적고 또 적었다. 적을수록 좌절감이 느껴지고 미천한 내가 느껴졌다. 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놓쳤을 수도 있을 이 시의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 날 이후 세상의 사물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달라졌다. 비록 시인의 눈은 가지지 못하였지만,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아가게 되었다.


삶이 뒤집히는 앎이 있고, 그 앎 이후의 삶은 더 이상 그 이전의 삶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배워야 한다는 말의 의미가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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