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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Sep 13. 2020

개저씨가 되기 싫어하는 자들의 대화 원칙들

개저씨

읽는 그대로 개와 아저씨의 합성어다.

불행하게 개가 뭔 죄가 있다고 또다시 부정적인 단어의 첫머리를 장식하게 되었다.

개와 아저씨, 모두 가치중립적인 단어지만 두 단어가 합쳐지면 누가 보아도 피해야 할 것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변신한다.


개저씨라는 단어가 쓰인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와 세대를 막론하고 40대를 기점으로 하는 아저씨라 불리는 이들은 자원과 권력을 독점해왔다.

그런 이들에게 '개'라는 접두사를 붙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변화를 의미했다.

자원과 권력을 독점해 온 그들에 대한 반발이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무례와 성범죄에 관용적인 사회분위기와 인성교육의 부재,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굽히는 권위주의적 행태를 만들어 낸 그들에 대한 반감이 개저씨라는 반발로 폭발한 것이다.


이런 개저씨가 아니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서 아저씨, 아줌마가 되어간다.

아저씨들은 누구나 개저씨가 될 수 있다.

아저씨들은 누구나 신사가 될 수도 있다.

전자는 노력이 필요 없지만, 후자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차이이다.

노력을 해야 멋진 신사가 될 수 있는 반면, 노력을 하지 않으면 개저씨가 될 수 있다니 조금은 불공평한 게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휩쓸면서 고고한 정신과 기개, 품위를 지키려는 선비정신은 구시대의 찌질함으로 버려졌고,

그 자리를 속물근성이라 불리던 돈만 좇는 정신이 차지하였다.

돈이면 무엇이던 된다는 속물근성이 왕좌를 차지하면서 자원과 권력을 독점한 아저씨들의 모든 행동에는 정당성이 부여되는 듯했다. 돈이 곧 능력이고, 돈이 곧 실력인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아저씨들이 자원과 권력을 가지지 못한다.

횡포를 부릴 권력도 자원도 없는 이들은 무례함으로 상실감을 표출한다.

무례함을 용인받을 만큼 자신은 대우받아야 한다고 느낀다.

갑과 을이 구분된 세상에서 을로써만 살아왔기에, 갑이 되어 횡포를 부리고자 하는 욕망이 그만큼 큰 것이다.


변해가는 모습을 바꾸기 위해서 무엇이 자신을 변화시키려는지 이해해야 한다.

개저씨라 불리는 모든 행동양식에는 상실감이 기저에 깔려있다.

이제 패자부활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흘렀으나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는 상실감

노력을 했으나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상실감

상실감에서 이 모든 것들이 시작된다.


상실감은 곧바로 자존감을 떨어뜨린다.

나는 멋지게 꾸밀만한 사람도 아니고,

지적으로 보일 필요가 있는 사람도 아니며,

예의를 갖추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만한 사람도 아니라는 생각이 스며든다.

나는 별것 아닌 사람으로 스스로 만들어 버린다.


자존감을 잃은 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행동은 곧 무례함으로 이어진다.

무례함에 대한 주변의 반발을 억누를만한 자원도 권력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 온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상실감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상실감은 무례함으로 대응을 하게 만들고 이 악순환이 끝없이 점점 더 커지면서 진행된다.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잃기 전에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잃은 후에 무엇을 가졌는지 알게 되지만,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얻기는 어려우나 잃기는 쉽기 때문이다.


영화 킹스맨의 콜린 퍼스 - 누구나 이런 아저씨가 되길 바란다.



'최근 6개월 사이에 설렌 적이 없다면 늙은 것이다'


아저씨라 불리는 것조차 거부하는 주변인들이 있다.

그들은 아저씨조차 되기를 거부하며, 아저씨가 되는 것을 늦추기 위한 대화의 원칙들이 있다.


원칙 1. 내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만 한다.

원칙 2. 6개월 내의 이야기만 한다.

원칙 3. 일, 부동산, 주식, 자녀교육, 가족 이야기는 제외한다.


이 원칙들이 합쳐지면 6개월 내에 내가 직접 경험해본 것들만 우리들의 이야기에 끼일 수 있다.

당연히 일, 부동산, 주식, 자녀교육, 가족 관련 이야기는 제외된다.

오롯이 내가 최근 6개월 이내에 경험한 일들만 주제가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원칙 1. 내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만 한다.

타인의 행동이나 경험은 우리들의 주제에 끼일 수 없다.

아무리 잘 나가는 연예인, 축구선수, 야구선수라 할 지라도 그들의 흥행과 성적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회사 상사, 동료는 나에게 직접 영향을 끼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들이 나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 내가 어떤 변화를 주고 있는지를 이야기 하기는 쉽지 않다.


40년 가까이 살아왔는데 이제는 온전히 나의 인생에 집중할 때가 된 것이다.

최소한 즐거운 친구들과의 대화 자리에서 만큼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 그것이 삶을 건강하고 젊게 만들어준다.

자유형 1000m 도전 실패기, 스니커즈 선택 실패기, 뒤늦은 아이폰 입문기, 스케이트 보드 연습으로 인한 골절상...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대부분 실패로 끝이 나지만 한없이 유쾌하다.


원칙 2. 6개월 내의 이야기만 한다.

굳이 라떼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40년을 살아왔는데 6개월 내의 이야기만 하라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많다.

매일매일 바쁘게 살고 있지만 반년 간 에피소드 하나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최근 6개월 사이에 설렌 적이 없다면 늙은 것이다'라는 나의 노화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여 정한 원칙이다.


매일매일이 똑같다며 불평하는 이들에게 정작 변화를 권하면 거부를 한다.

돈과 시간이 없다는 것이 99%에 해당하는 이유이다.

클래식 음악을 취미로 하기 위해서는 클래식 FM을 들으며 출퇴근하는 매우 간단한 방법이 있다.

사진을 취미로 하기 위해서는 가지고 다니는 휴대폰으로 매일 오가는 길거리를 담으면 된다.

장비를 갖추어 스쿠버 다이빙을 할 수 없다면, 주말에 바다에 가서 스노클만 해도 충분하다.

퇴근 후에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거나 동네 주변을 뛰는 것도 좋은 변화이다.

커피나 홍차를 배우기 위해서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읽고 다이소에 가서 마음에 드는 컵을 사면 된다.

6개월간 새로운 변화를 주기 위한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고 변화하기에 늦은 것이라 규정하는 순간부터 늙음은 시작된다.

가장 최근에 설레었던 적이 언제인지 생각해보라.

늦어도 반년에 한 번, 일 년에 두 번 설레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굳지 않는다.

굳어버린 마음은 굳어버린 폐처럼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굳은 폐가 숨을 가쁘게 하듯, 굳은 마음은 인생을 가쁘게 한다.

그렇게 서서히 가쁜 숨을 들여 쉬듯 삶이 꺼져간다.


원칙 3. 일, 부동산, 주식, 자녀교육, 가족 이야기는 제외한다.

이야기의 시간 동안 만이라도 세속적인 것을 벗어나고 싶었다.

게다가 일, 부동산, 주식, 자녀교육, 가족 이야기는 뚜렷한 이야기 대상이 있지 않은가.

일은 회사 사람들과, 부동산은 중개업자, 주식은 증권사 직원, 자녀 교육은 교사, 가족 이야기는 가족과 하면 된다. 왜 엉뚱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려 하는가?

비전문적인 카더라 통신을 나누는 것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해당 주제는 노화를 가속시킬 수 있다는 의견이 모아져 원칙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원칙을 철저하게 준수하면서도 4~5시간의 수다는 끊김 없이 진행되고, 헤어질 때 아쉬움을 남긴다.




모두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평범한 이들이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해 본다는 것, 그리고 어설펐던 경험을 당당하고 유쾌하게 공유하는 것을 체화하고 싶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모든 것을 가지고 힘이 있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한국 사회에서 어설픔을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항상 새로운 주제가 준비되어 있고, 재미있게 풀어낼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삶이 풍성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주제라고 해봐야 한 없이 소소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평범한 이들에겐 충분히 풍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아저씨가 될 것이다. 이미 되었는지도 모른다.


보름달이 뜨면 늑대로 변하는 늑대인간보다 무서운 개저씨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아저씨들은 새로운 경험을 위해 몸을 던진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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