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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Nov 10. 2020

사랑하고 있을 때는 그릴 필요가 없다.


“야, 갑자기 언젠가부터 그 얘 얼굴이 안 떠올라.”

“그려둔 건 없어?”

“없어”

“왜 안 그렸어?”

“사랑하고 있을 때는 그릴 필요가 없었거든.”


구차하게 그리지 않은 이유를 묻는 나에게 그는,

사랑할 때는 관찰하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관찰에는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라 했다.

사랑할 때는 거리를 두지 않는다고 했다.


왜 그녀의 그림이 없냐는 물음에 대한 한 때 화가를 꿈꾸었던 친구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들어보겠다고 다짐한 건 사진을 진지하게 시작한 지 몇 년정도 지난 후였다. 사진을 찍기 전에는 왜 저딴 흔들린 사진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진이라는 세계에 진지함을 가지고 들어선 지 몇 년이 지난 후 책장에 꽂혀있던 '있어 보이는' 매그넘 사진집을 다시 보았을 때 무엇인가 느껴졌다. 말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단지 내가 느끼지 못했을 뿐. 사진의 의미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었다.


멀리 오스트리아까지 가서 지루한 클래식 음악을 듣기 위해 천만 원이 넘는 돈을 쓴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술의 전당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들이차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진이라는 매개체가 없었다면 이 또한 있는 자들의 허영으로 치부하고 지나갔으리라. 하지만 이유를 알고 싶었다.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무엇인가 숨겨진 매력이 수백 년간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클래식 음악에 다가섰다.


지독한 음치에 박치인 나는 도무지 선율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외국어를 듣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에겐 인내와 노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운전하는 내내 클래식 FM만 주구장창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생경한 음악을 피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듣는 인내와 노력을 쏟았다. 이렇게 반복한 지 3년 정도가 지나자 언젠가 들어보았던 음악이 다시 들렸고, 친근한 선율이 들어왔다. 점점 그리고 조금씩 클래식 음악이 가진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부모님 집으로 가는 고속도로에 막 올라갔을 때, 베토벤 교향곡 9번이 시작되었다. 더운 날이었음에도 팔에 소름이 돋았다. 음악이 주는 전율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고속도로 출구 즈음 마지막 악장이 차 안을 휘몰아치며, 그때 이제 클래식 음악을 듣지 않고 살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도 그러하다. 처음의 낯섦과 설렘에서 출발하여 인내와 노력으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일을 사랑하는 경우에도, 자신을 사랑하는 경우에도, 타인을 사랑하는 경우에도, 사랑은 언제까지고 이처럼 배움의 길을 걸어야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거나, 나의 감정을 나누는 것도 아니며,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지라도, 그 상태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로 올가미 씌워 차이를 메우거나 어느 한쪽을 움츠려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대상 혹은 사람 모두 있는 그대로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다.



멋진 척하는 친구가 말했다.

행동은 약속할 수 있는데 감정은 약속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감정은 의지가 지배하는 세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영원히 사랑한다는 약속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 돌아보니 사랑은 감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은 사랑한다는 행동 그 자체인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을 믿는다고.


음악을 사랑하면 음악을 들어야 한다. 사랑하는 감정을 지니고만 있어선 안된다.

아이를 사랑하면 껴안고 사랑한다 말해주라. 사랑하는 감정을 지니고만 있어선 안된다.

아내를 사랑하면, 부모님을 사랑하면, 친구를 사랑하면, 행동해야 한다.


덧.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그 친구도 후회를 하고, 며칠 전 아내와 다툰 나도 후회를 하고.

글로 적는 사랑은 쉽지만, 행동하는 사랑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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