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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Nov 11. 2020

미쳤다는 것,행복하다는 것,그리고 잠시 부러웠다는 것

“미친 거 아니야?”

그놈은 미쳤다.

일에 미쳤다.


미친만큼 많은 것을 요구했다.

여분의 노트북 배터리

성능 좋은 노트북

새로운 프로그램

등등

그는 끝없이 요구했다.

그것도 당당하게 요구했다.

단 하나도 그가 요구한 것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특혜를 받을 만큼 특별한 사람이 아니기에.

조직은 그의 요구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새벽 2시에 전화가 왔다.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부터 치밀어 올랐다.

나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스피커 너머, 몇 개월을 같이 고민하던 부분을 풀었다고 기뻐하는 목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커피와 몬스터에 쩔어버린 그의 얼굴과 수개월간 우리를 괴롭혀 왔던 문제의 잔해를 볼 수 있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의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에 미친놈과 친분을 유지하는 것은 미칠 노릇이었다.


그놈은 돈이나 직급이 아니라, 진짜 일을 즐기는 놈이었다. 이 미친놈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일을 하라고! 일을!”

매니저의 고함이 들려왔다.

임원이 코 앞인 매니저에게 더없이 중요한 업무가

그에겐 한낱 잡무에 불과했다.

그에겐 그건 일이 아니었다.


겁 없이 아웃룩을 꺼놓고 일하던 그에게

결국 매니저의 분노는 터지고야 말았다.

매니저의 손에 있던 볼펜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퇴근 시간이 지난 후 담담히 앉아 어제 아마존에서 배송되었다는 책을 펴 드는 그의 모습은 존경스러웠다.

학교 다닐 때도 보기 싫었던 교과서 같은 원서를 펼치는 그에게 일종의 경외심까지 느껴졌다.

매니저의 볼펜이 날아들었던 일은 이미 잊은 듯했다.

엔지니어링은 그의 천직이었다.

끝없이 깊이 파고들었다.

파고들고, 넓혀 가는 만큼 모르는 것이 생겼고,

끊임없이 정복해 나갔다.


그렇게 미쳐 일하던 그에게 결국 일이 터졌다.

국제적으로 저명한 협회의 일원이 된 것이다.

엄청난 반향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조직도 그를 인정할 거라 생각했다.

나는 순진했다.

조용했다.

무서우리만큼


아무도 그를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전히 잡무가 매니저들의 주요 업무였다.

그들에겐 기술의 진보보다 자신들의 진급이 우선이었다.

입으로만 기술이 중요하다고 외칠 뿐, 그들의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신문에 그의 이름이 실리자,

그제야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임원은 장황한 축하 인사 메일을 보내고,

조직에서는 그를 위한 보상을 논의했다.

그리고 보상금이 입금된 다음날 그는 퇴사를 결심했다.


금액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주지 않았어야 했다고 했다.

능욕당한 기분이라고 했다.

자신의 기분이 문제가 아니라,

기술에 대한 조직의 태도에 분노했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떠났다.




떠난 지 몇 년 만에 스스로 회사를 세웠다.

순식간에 업계에서 이름을 알렸다.

업계가 그를 찾았다고 하는 것이 더 맞으리라.


놀러 간 그의 회사에서 직원들은 모두 죽을 상이 었다.

사장이 어떠냐는 말에 모두 이구동성으로 일에 미친 사람 같다고 했다.


어제도 2시간 잤다고 한다.

손에는 필기가 가득한 페이퍼를 말아 쥔 채.

같이 일하는 직원들은 열정이 없다며 푸념한다.

같이 일하자 제안한다.

단번에 거절했다.

너 같은 미친놈과는 일하지 않을 거라고.

같이 얼굴을 바라보며 웃는다.

자기도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웃음이다.


미친놈의 웃음 속엔 행복이 보였다.

미치는 것이 행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놈이 조금 부러워졌다.

잠시 동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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