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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Oct 28. 2020

우리는 탐욕스러운가?

 It's too greedy.

삶을 바라보는 인간의 방식은 그의 운명을 결정한다.
-슈바이처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분노했다. 바가지요금 때문이었다. 발이 묶여 바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여행객들을 바가지요금으로 맞이했다는 것에 분노했다. 이러한 분노는 그럴만한 (그런 것을 가질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얻는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부당함에 대한 거부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숙박업소 주인이나 식당 주인이 관광객을 상대로 정가보다 높은 금액을 요구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분노한다.


오래전 신대구부산 고속도로가 처음 개통되었을 무렵이었다. 이 고속도로에는 ‘청도 새마을휴게소’라는 휴게소가 딱 하나만 존재한다. 하나만 존재하는 휴게소인 관계로 주말이나 명절 무렵에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든다. 더운 여름이라 생수 한 병을 사러 들어 간 휴게소에서 복잡한 인파를 헤치고 집어 든 생수병은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가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목마름도 잊고 이런 폭리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갈증을 견디겠다는 생각으로 그냥 나와버렸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이 휴게소의 바가지요금은 많은 이들의 원성을 샀다.




어쨌든 우리의 이야기는 코로나 확산 시기에 마스크를 매점매석하거나 가격을 높이는 했던 이들의 악행(?)을 들먹이며 힘든 시기에 공동체 일원이 처한 어려움을 이용해 돈 벌 궁리를 하는 것은 공동체에 해가 되는 행위이므로 제대로 된 공동체라면 이러한 지나친 탐욕은 공동체가 어느 정도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억제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어갔다.


친구의 분노 가득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어 갈 무렵, 자본주의에 애정이 가득한 다른 한 친구의 신랄한 반론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YES라고 할 때, NO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런 분위기가 정말 좋다.)


산의 정상에서 파는 아이스크림과 같이 많은 수요가 예상되지만 공급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곳을 선점하여 리스크를 감수하고 물건을 파는 경우 그 리스크에 대한 비용을 가격에 포함시키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이미 수많은 재화가 독과점에 의해 가격이 정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경쟁시장에서는 공급과 수요에 맞춰 가격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또한 높은 가격을 받음으로써 더 많은 판매자를 유인하는 동인이 되고 더 많은 판매자가 더 좋은 조건으로 물건을 공급함으로써 가격은 내려가고 소비자는 더 좋은 물건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관광지의 숙박업소나 식당에서의 적정한 가격이라는 것은 수요로 정해지는 것일 뿐, 바가지요금이라 할 수 없지 않겠냐며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반론 덕분에 자칫 바가지요금을 씌운 숙박업소 주인과 식당 주인을 성토하고 끝났을 자리가 오랜만에 진지함을 머금은 토론장으로 바뀌었다.


바가지요금이라는 편향된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로는 공정한 토론이 진행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아파트’라는 재화로 사고 실험을 제안했다.

미리 이야기 하지만 부동산 정책을 평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그럴 능력도 없을뿐더러 나의 관심 영역도 아니다. 그저 분노의 근원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근원을 파헤치기 위해 가장 민감할 수 있는 주제를 끄집어낸 것뿐이다.


놀랍게도 생수 한 병 가격에 함께 분노해주던 다수가 생수가 아닌 아파트를 대상으로 치환하는 순간, 순식간에 자본주의의 속성을 각성하여 좋은 입지의 아파트를 선점하는 것은 투자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높아진 아파트 가격은 입지와 미래가치를 고려하여 시장이 정한 가격이기 때문에 현재의 시가가 정가이며 이는 우리가 이야기했던 바가지요금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열띤 토론은 거의 2시간이나 이어졌고 그란데 사이즈 커피가 바닥을 보일 무렵에야 걸려온 전화로 인해 토론의 포문을 열었던 자본주의의 화신인 친구가 집으로 소환되어 버리는 바람에 종결되었다. 결론은 없었다.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자신들의 주장의 정당함을 뒷받침하기 위해 아담 스미스의 가격이론부터 초과수요가 있으면 가격이 무한히 상승할 수밖에 없다는 레옹 발라스와 한계효용까지 온갖 장황한 이야기가 나왔고, 가격과 공급의 균형이 무너졌던 개개인의 경험이 총동원되었다. 어쨌든 결론은 없었다.




친구들과의 토론에서 관심을 끌었던 사실은 우리가 분노했던 진짜 이유는 탐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분노의 이면에는 ‘기회’라는 단어가 숨어 있다고 느꼈다. 탐욕이라는 것은 기회를 박탈당한 것으로 분노의 감정을 드러낼 수 없다는 자기 검열이 분노의 이유로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였다. 내가 느낀 분노의 본질은 기회였던 것이었다.


모여있는 친구들은 그 누구도 숙박업을 하거나 식당을 운영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숙박업이나 식당으로 성수기 독과점의 과실을 느낄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휴게소에서 생수를 팔아 얻을 수 있는 바가지요금의 달콤함을 자신이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모여있는 우리 모두는 소비할 뿐 공급하거나 유통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럴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여 상대방에 나를 대입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에 공감했던 것 같다.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기회를 이용해 누군가는 부당하게 이득을 취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약 우리 중 누군가가 숙박업을 운영하거나 식당을 운영했다면 성수기 혹은 관광지의 높은 가격에 대한 변론을 펼쳤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대상이 아파트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아파트를 소유할 기회가 나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혹은 이미 가지고 있는 기회를 부당하다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회’의 소유 여부에 따라 힘든 시기에 공동체 일원이 처한 어려움을 이용해 돈 벌 궁리를 하는 것은 공동체에 해가 되는 행위이므로 제대로 된 공동체라면 이러한 지나친 탐욕은 공동체가 어느 정도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억제시켜야 한다는 우리 스스로 세운 강령이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짐을 목도할 수 있었다.


우리는 탐욕스러운 것인가?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무엇이 탐욕인 것인지, 탐욕스러움에 분노해야 하는지.

분노의 기원이 '기회'라면, 어떻게 기회를 나눠야 하는가?

알 수 없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불가지론 아래에 숨기에는 눈 앞의 현실이었고, 답을 찾으러 나서기엔 세상은 너무 넓었다.




중국인 친구가 있다. 15년 지기인 그를 만나러 상하이에 갔을 때였다.

펀드를 운용하는 사업체를 가진 그에게 눈 앞의 높은 빌딩을 바라보며, 성공하여 저런 빌딩을 세워보라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나의 말에 그 친구는 저런 빌딩은 가지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렇게 많은 돈은 필요 없다 했다.

‘왜?’라고 묻는 나의 질문에 돈으로 돈을 버는 펀드를 운영하는 내 친구는 웃으며 대답했다.


It’s too gre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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