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이 차는 꼭 사야 해! #마지막편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중>
무소유의 의미에 그렇게도 감명을 받았건만, 미니멀한 삶을 그렇게도 동경했건만, 소유의 유혹을 끊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유는 때로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그저 자동차라는 기계를 가지고 싶은 것이다.
수천수만 개의 금속조각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를 그저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한없이 잘 만들어진, 엔지니어링의 극치를 느낄 수 있는 금속공예품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현실적’이라는 단어 앞에서 금속과 목재는 플라스틱으로 바뀌었고, 다들 숫자를 외워 스펙을 앞세우는 세상이 도래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배기음의 울림과 엔진 회전 질감을 구매를 결정짓는 요소로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적’인 소비자 앞에 서기 위해서 제작사들도 ‘현실적’이 될 수밖에 없다. 엔진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덮고 감춰야 할 소음에 불과해졌다. 프리미엄, 럭셔리라 불리는 차들까지 플라스틱 재질의 스티어링 휠을 달고 나온다. '현실적'인 현실은 차와 내 몸이 닿는 유일한 공간인 스티어링 휠까지 플라스틱으로 도배시켜 버렸다.
올드카나 영 타이머(올드카로 보기에 어려운 차령 30년 이내의 차를 일컫는 말)의 차주들에게 ‘필요’나 ‘가성비’는 무의미하다. 그들에게는 순수한 소유가 소유의 목적이다. 끊임없는 관리와 지극한 관심이 전제되어야 유지되는 올드카나 영 타이머를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현실적’이지 않다. 끝없이 성장할 것 같았던 그 시절, 오버 엔지니어링이 원가절감을 압도하던 그 시대의 절정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타협하는 합리보다 극한의 절정을 원했던 그 시대의 편린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가성비와 연비라는 단어가 뒤덮어버린 ‘현실적’인 시점에 어울리지 않는 비현실적인 소유욕구가 차를 가지게 한다. 비록 올드카나 영 타이머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기술을 나의 소유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이다. 시대의 첨봉에 서 있는 기술을 소유하고 체험하고 싶은 욕구도 같은 맥락이다.
눈 앞의 빨간 티뷰론은 현실의 차가 아닌 듯했다. 애초에 책에서나 보아왔던 페라리나 람보르기니는 현실감이 떨어져서일까? 눈 앞의 티뷰론은 현실 속의 차였으나, 현실로 인식되지 않았다. 가슴앓이가 시작되었다. 벌이가 없는 학생의 신분으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시간이 흘러 홀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그때 다시 마주친 티뷰론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나의 소유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그런 설렘을 느낄 수 없었다. 며칠을 망설였다. 금전적인 문제가 아닌 감정의 문제였기에 더욱 치열하게 고민했다.
결국 추억은 추억으로 두기로 하였다. 노쇠한 티뷰론을 소유하여 기분 좋고 가슴 뛰는 설렘의 추억이 실망으로 치환될 것 같은 두려움이 컸다. 이왕 마음먹은 것 티뷰론만큼 설레는 차를 찾았다. 하지만 이미 시간은 흘렀고, 홀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나에게 티뷰론만큼의 설렘을 주는 차는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티뷰론을 소유할 수 없어 가슴앓이했던 그 시절, 그때 나와 티뷰론만큼의 간극이 있어야 그만큼의 설렘과 소유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음을. 그때 티뷰론은 오늘 티뷰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생 시절의 나는 티뷰론만으로도 3000만큼의 설렘과 소유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사정이 나아진 나는 그 당시 티뷰론의 수 배에 달하는 차를 소유해도 그만큼의 설렘과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소유의 기쁨과 설렘을 얻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처음 제네시스 쿠페를 구입해 달리던 그 밤의 느낌은 앞으로 느끼지 못할 것임을 느꼈다. AMG GT를 타고 달리는 순간에도 반도 안 되는 배기량으로 밤거리를 달리던 빨간 나의 제네세스 쿠페에서의 기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영영, 아무리 부유해져도 그때 그 기분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늦지 않게 그 기분을 경험하여 기억 속에 갈무리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한 없이 ‘현실적’인 세상이다. 모든 것은 가격이라는 세속적 가치와 비교하여 적정한 성능을 가져야 한다. 1%의 더 나음을 위해 200%의 비용을 지불하기를 주저한다. 하지만 세상은 가치는 알아보는 이가 앞으로 나간 후에야 추종자들이 몰려와 대중 속에 스며든다. 추종자들은 끊임없이 ‘가성비’를 외치건만, 가치를 높이는 것은 절대적인 가치를 판별하는 안목을 지닌 이들고, 그들이 지나간 후에야 가성비를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더 빠르고, 더 고급스럽고, 더 안정적인 차를 원하고 요구하는, 자동차의 진가를 구별할 줄 아는, 1%의 진보를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르고 경험하여 피드백하는 그들이 있기에 우리들은 높아지는 ‘가성비’를 경험할 수 있다. 소유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수많은 경험이 모여 새로운 진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무소유의 이야기가 더없이 와 닿는 까닭도 진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소유하고 소비해야 하는 삶의 모순 때문일지도 모른다. 차를 가져야 할 이유가 너무 장황해져 버렸다. 어쨌든 차는 한 번 소유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그 시덥잖은 이야기가 길어져버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