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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Dec 14. 2020

우리,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거죠?

하루는 피카소가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그런 경우에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옆 좌석의 신사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승객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 나자 현대 예술이 실재를 왜곡하고 있다면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카소는 그에게 실재라는 것의 믿을 만한 본보기가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승객은 지갑 크기의 사진을 한 장 꺼내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요! 진짜 사진이죠. 내 아내와 정말 똑같은 사진이오." 피카소는 그 사진을 여러 각도에서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위에서도 보고, 아래로도 보고, 옆에서도 보고 나서 피카소는 말했다. "당신 부인은 끔찍하게 작군요. 게다가 납작하고요."


굳이 칸트의 관념론을 끌어오지 않아도, 타인과 내가 보는 같은 사건이 다르게 해석됨은 이미 잘 알고 있다. 나에게는 너무나 화가 나서 분을 삭히지 못할 일인데 타인에게는 그냥 웃고 지나칠 일이 될 수도 있고, 나에게는 너무나 즐겁고 반가운 일인데 타인은 시큰둥하게 받아들일 때도 있다.


우리는 많은 시간 아니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자신이 보고 있는 사건이나 사물이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당연히 타인도 나와 동일한 생각과 감정을 가질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 관계가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같은 신체기관을 가졌음에도 그것을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개개인의 경험이나 앎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인다. 너와 내가 똑같이 식탁 위의 귤을 바라본다 해도, 귤을 바라보고 느낀 감정과 생각은 모두 다르다. 영화를 본 후 감동에 겨워 스크린에 올라가는 크레딧을 바라보며 감동의 여운을 즐기고 있을 때 부산스럽게 일어나 분위기를 망치는 타인들과 빨리 나가자며 재촉하는 친구가 있지 않았는가?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스토리를 보았음에도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모두 달랐던 것이다.


감정의 전달은 공감에 기초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타인이 똑같이 느낄 수 없다.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감이라는 과정 속에서 타인의 이야기나 사건 속의 주인공이 되어보는 롤플레잉을 머릿속에서 진행한다. 순간적으로 이뤄지는 사고 실험 같은 것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나 사건 속에서 롤플레잉을 했을 때 솟아나는 감정, 그것이 공감의 근원이 된다. 하지만 사람은 저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사건을 롤플레잉 하더라도 그 결과는 다를 수 있다. 상대가 느끼는 감정의 결과 내가 느끼는 감정의 결이 일치하지 않을 때, 나는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상대방 또한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나의 감정과 상대의 감정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우리는 거기에 실망하고 다시 기대한다.



감정만이 다른 것이 아니다.

단순하게 같은 사건을 바라본 후 느끼는 감정만이 다른 것에 그치지 않고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멀어지게 된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자율주행 자동차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는 LiDAR(Light Detection And Ranging) 기술이다. 이 기술은 초당 수백만 개에 달하는 레이저빔을 지속적으로 발사하고, 레이저 광선이 센서에 되돌아오는 시간을 계산해 거리를 측정하는 것으로 박쥐의 시각화 능력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보는 식탁 위의 귤의 모습과 박쥐가 보는 귤의 모습이 동일할까? 인간과 더 가까운 개나 고양이는 어떨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보는 식탁 위의 귤의 모습이 아닐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 귤의 모습일까? 내가 만약 동물의 말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박쥐나 개, 고양이에게 사실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일까?


어디 동물뿐이겠는가?

박쥐나 개, 고양이는 종이 다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면, 과연 인간끼리는 문제없이 소통할 수 있을까? 색맹과 같은 장애요소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같은 본질을 다르게 바라본다. 이 글의 도입부에 소개한 피카소의 일화처럼 우리는 우리가 본질이라 믿고 싶은 것을 믿고 살아간다. 내가 바라보는 것이 본질이라 믿는 순간 나와 다른 해석을 내어놓는 타인은 본질을 왜곡하거나 잘못 보고 있다고 단정 짓는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과 다르게 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죄가 되는 순간이 된다.


원래 그런 것이다. 

중학교 때였다. 엄격한 두발 규정에 짙은 남색으로 기억되는 교복을 입고 가는 것은 나에게는 고역이었다. 멋을 부리지 못하거나 불편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모두 똑같은 머리 모양에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건물로 몰려가고 쏟아져 나오는 그 자체가 불편했었다. 두발 규정과 교복에 대한 질문에 돌아온 답은 다른 데 신경을 쓰지 않고 공부에 집중하기 위한 배려라는 답이었다. 이해하지 못한 내가 머리가 길면 공부를 못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고 그에 대한 답은 '귀싸대기'라 불리는 사랑의 매(?)였다. 그리고 더 이상 나는 묻지 않았고, 왜 맞아야 했는지, 왜 그토록 화를 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시간이 흘러서야 모두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고,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알고도 모른 척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는 좀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오랜 세월 살아오고, 많은 것을 머릿속에 채워 넣었건만 너의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기를 버거워하는 이들이 있다.


내가 보는 세상과 타인이 보는 세상은 다르다.

내 마음과 타인의 마음도 다르다.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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