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함을 알아보는 법
자, 됐다. 기꺼이 나는 죽음 앞으로 나아간다. 만약에 내가 예술을 위해 나의 모든 가능성을 다시 한번 펼쳐 보일 기회를 갖기 전에 죽음이 찾아온다면, 그때는 나의 운명의 신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내게는 죽음이 너무나 일찍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죽음이 더 늦게 오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죽음이 일찍 다가오더라도 나는 행복할 것이다. 죽음은 나를 끝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않겠는가? 언제든지 오너라. 나는 용감하게 네 앞으로 나서련다. -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루트비히 폰 베토벤
여기 한 명의 작곡가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음악가로서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인 청력을 상실하고 만다. 이제부터 그는 철저하게 홀로 남겨진다. 그의 전위적인 시도는 더 이상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 아닌 청력을 상실하여 갈 길을 잃은 결과물로 평가받기 십상이다. 듣지 못하는 작곡가라는 치명적인 상실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의 유서는 상실감을 죽이는 유서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일어섰고 인류의 음악사에 영원히 남을 작품을 남긴다. 그의 이름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다.
예술은 항상 과거를 딛고 나아간다.
낭만주의를 딛고 리얼리즘과 절대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사실주의가 태동했고, 이를 딛고 화가의 주관과 감성이 강조되는 인상주의가 태동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개념을 걷어내고 순수하게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고자 했다. 가감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런 화가에게 시력이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 시력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면... 그가 그린 흐릿한 그림을 어떻게 평가할까? 그는 인상주의라는 사조를 열어젖혔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인상주의 화가로 영원히 남을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이름은 모네이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뿐이오. - 마하트마 간디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군중들 앞에 한 남자가 나선다. 그는 제국주의자들의 폭력에 맞서지 말자고 한다. 악을 악으로 대하기보다 사랑으로 감싸고 폭력에는 비폭력 불복종의 인내의 투쟁을 하자고 역설한다. 투쟁을 역설하는 그가 내향적이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우울증까지 가진 이라면... 그의 성격적인 결함으로 제국주의자의 폭거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비폭력 불복종'이라는 허울 좋은 말로써 호도하려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우울증으로 자살까지 생각했던 그는 마하트마 간디이다.
(사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의 모병관으로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 영국군의 훈장을 무려 3개나 받았고,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인 불가촉천민에게 적대적이었다. 게다가 1919년 인도인을 영장 없이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롤레트 법이 통과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독립활동을 시작한 점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참고로 이때가 그의 나의 50세 때이다.)
본질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삶을 대할 때 항상 껍데기를 먼저 보게 되고, 겉모습에 현혹되고, 외양을 꾸미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본질을 보고 평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곧 진정함이다.
삶 속의 수많은 선택에서 우리는 진정함을 보려고 애쓰기보다 껍데기를 바라본다. 껍데기는 보여주기 쉽고, 얻기 쉽고, 버리기도 쉽기 때문이다. 진정함을 보기 위해서는 진정성을 평가할만한 식견을 가져야 하지만, 그 식견은 노력 없이 얻을 수가 없다. 설사 노력 끝에 진정함을 느낄 수 있는 칼날 같은 감별안을 지녔다 해도 그 진정성을 타인에게 내보이기는 쉽지 않아 자랑하고픈 허영을 충족시킬 길도 없다.
나는 힘이 들 때마다 베토벤 교향곡 5번과 7번을 연달아 듣는다. (DG 레이블의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 아마 거의 모든 클래식 애호가들은 가지고 있을 듯하다.) 심사가 복잡할 때면 베토벤 현악사중주 17번 대푸가를 듣는다. 모두 베토벤이 청력을 상실한 이후에 작곡된 곡이다. 특히 현악사중주 17번은 청력이 완전히 상실된 후 작곡된 것으로 갑자기 시끄럽고 어긋나는 15분 이상 지속되는 푸가가 흘러나온다. 자신을 부정하듯 청력상실로 인한 세간의 평을 정면으로 반박하듯...
베토벤의 음악이, 모네의 그림이, 간디의 비폭력 저항이 시간의 시험을 통과하여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진정성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청력을 상실한 작곡가라는 편견, 시력을 잃어가는 화가라는 편견, 우울증을 겪는 비폭력 운동가라는 편견으로 그들의 진정성을 외면했다면 우리는 그들의 업적을 공유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인류 최고의 작품을 놓치고 말았으리라.
껍데기가 부족해 좌절했는가?
껍데기만 바라보는 눈이 있되 볼 줄 모르는 이들의 평가를 이겨내길 바란다.
진정성은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한 번 드러난 진정성은 껍데기로 이길 수 없는 법.
지금 이 순간에도 내면의 본질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