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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Dec 16. 2020

나이 스물에 죽으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단다.

1832년 5월 30일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그를 한 농부가 발견한다.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뱃속 깊숙이 박힌 총알은 그를 죽음으로 맹렬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숨 쉬고 있으나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그의 곁에는 이제 겨우 13살이 된 막냇동생(알프레드)만이 있을 뿐이었다. 가족에게 외면당한 채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그는 홀로 지켜주는 막냇동생에게 어렵게 말을 꺼낸다.


"울지 마라... 알프레드, 나이 스물에 죽으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단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유언이 되어버렸다.


1832년 5월 31일

혼수상태에 빠진 그는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스물이었다.



1811년 10월 25일

프랑스 소도시 시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생활하였다. 12살이 되던 해 그는 명문 기숙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15세가 되던 해 프랑스 수학자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Adrien-Marie Legendre)가 쓴 <기하학 원론 Éléments de géométrie, 1794>을 읽고 수학에 빠져 에콜 폴리니테크(프랑스 최정상의 이공계 엘리트 교육기관)에 입학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사실 <기하학 원론>은 수학자들을 위한 전공서적으로 2년 과정의 커리큘럼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책인데 그는 단 이틀 만에 이 책을 독파해낸다. 수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그였으나, 수학에 대한 집착이 심해져 광기에 가깝게 변해갔다. (이 때문에 막냇동생을 제외한 가족들과 멀어지게 된다.)


불행 #1

그는 일생의 목표였던 에콜 폴리니테크에 도전했으나 낙방하고 만다. 에콜 폴리니테크는 단 2번의 도전만을 허용하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걸고 에콜 폴리니테크에 입학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당시 프랑스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아버지가 정치적 음모에 휩쓸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벌어진다. 그로 인해 더욱 고립되고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던 그는 결국 두 번째 에콜 폴리니테크 입학시험에서 면접관을 무시하는 태도와 수학 외의 과목에서 성적이 좋지 않아 탈락하게 된다.


불행#2

에콜 폴리니테크 입학 전 프랑스의 대수학자 오귀스탱 코시(Augustin Louis Cauchy, 프랑스 왕립과학원 교수)에게 자신이 발견한  5차 방정식의 대수적인 해법이 없음을 증명하는 내용을 보냈었다. 비록 원하던 에콜 폴리니테 입학에는 실패했으나 이 논문으로 만회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코시는 건강 문제로 논문 게재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잊고 말았다. (코시는 이 논문에 매우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불행#3

에콜 폴리니테크 입학에 실패한 그는 에콜 프레파라투아(École préparatoire, 현재의 파리 고등사범학교 - 이곳도 역시 엘리트 교육기관(그랑제콜)이다.)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다시 한번 더 논문을 프랑스 왕립과학원으로 보냈고, 이번에는 장 바티스트 조지프 푸리에(Jean Baptiste Joseph Fourier) - 푸리에 급수의 그 '푸리에' - 에게 들어갔으나 논문을 받고 몇 주 후 푸리에가 갑작스럽게 열병으로 죽으면서 그의 논문은 분실되고 말았다.


불행#4

1830년 7월...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혁명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그는 그가 다니던 에콜 프레파라투아의 교장이 학생들의 혁명 참여를 금지시키자, 교장을 비난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한다. 그리고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에콜 프레파라투아에서 퇴학당하게 된다.


불행#5

퇴학당한 그는 공개 강연에서 자신의 발견을 발표할 기회를 얻었고, 그 자리에는 프랑스 왕립과학원 회원이자 그랑프리의 심사위원인 시메옹 드니 푸아송(Siméon Denis Poisson) - 공대 재료역학의 '푸아송 비'의 그 푸아송이 맞다. -이 있었다. 푸아송은 그에게 프랑스 왕립과학원에 한 번 더 연구결과를 제출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오는 듯했다.


이후 그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국왕을 위협하는 언사로 체포되었다. 그를 변호하고자 했던 그의 친구들은 푸아송으로부터 답변을 받지 못해 초조한 나머지 저지른 일이라 신문에 기사를 썼고, 여기에 분노한 푸아송은 그의 논문을 불합격 처리 해 버린다.




1832년 5월 30일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그를 한 농부가 발견한다.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뱃속 깊숙이 박힌 총알은 그를 죽음으로 맹렬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그의 막냇동생, 알프레드뿐

혼수상태에 빠진 그는 다음 날 오전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 후의 불행

혁명을 열망했던 그의 뜻을 기리고자 그의 친구들은 그의 죽음을 내걸고 폭동을 준비했으나, 공교롭게도 그 다음날 나폴레옹의 심복이었던 라마르크 장군 또한 콜레라 숨을 거두면서 그의 죽음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로 인해 급박하게 진행되어 버린 장례식으로 그는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있는 묘는 가묘라 한다.)




그의 업적은 친구인 슈발리에의 노력과 초월수의 존재를 증명한 대수학자이자 에콜 폴리니테크 교수였던 조제프 리우빌 (Joseph Liouville. 1809~1882)에 의해 사후 10년이 지난 후에야 빛을 보게 되었다.


이후 그를 심사했던 에콜 폴리니테크 면접관들은 천재를 알아보지 못한 직무유기라는 죄목으로 징계를 당하게 되었고, 에콜 폴리니테크의 입시 제도 개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영향으로 입학 시 수학에만 뛰어났던 천재 쥘앙리 푸앵카레(Jules-Henri Poincaré)가 입학할 수 있었다.)


평생이 불행으로 점철된 이 천재의 이름은 에바리스트 갈루아(Évariste Galois)다.

근과 계수의 관계만으로 현대 대수학의 군의 개념을 세운 그의 수학적 천재성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갈루아가 세운 수학의 세계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불행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

덧없이 짧았으며, 사랑하는 이에게 거절당하고, 가족으로 부터 외면당했을 뿐만 아니라 천재성을 드러 낼 수없는 기회가 불운으로 덮여버린 그의 일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글의 말미에 다다르자 말문이 막혀버린다. 어떤 위로가 그에게 위로가 될 것이며, 우리가 기억해 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짧은 삶 속에서도 즐거웠고 행운의 순간이 있었을 거란 나만의 믿음을 가져본다. 그렇지 않다면 한 인간의 삶은 너무나 가혹했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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