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안 Dec 19. 2020

미안해, 그 어려운 말 한마디

2020년 12월 17일 대한민국 여성가족부는 유니클로를 '가족친화 우수기업'으로 선정했다.


"미안해"라는 말은 어려운 말이다.

진심을 담은 "미안해"라는 말은 정말 어려운 말이다.

"고마워", "사랑해"와 같이 나를 던지는 말이 아닌, 상대가 받아줘야 하는 말인 "미안해"는 가장 어려운 말이다.



1951년 독일 하원 연설장에 당시 독일 수상인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수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에 담긴 힘든 범죄가 독일 국민의 이름으로 저질러졌고, 그에 대한 도덕적, 물질적 보상이 필요하다"


2000년 이스라엘 국회 연설장에 당시 독일 대통령인 요하네스 라우 대통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유대인 대학살을 사죄했고, "독일인이 한 일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


유대인이 세계 경제를 휘어잡고, 최강대국인 미국을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개인이 아닌 한 나라를 대표하여 공개적으로 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 모두가 역사적으로 부정의했던 일에 대하여 이러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을 언급하는 것은 감정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어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다른 사례를 찾아보았다.


호주는 1910년~1970년 사이 원주민의 아이들을 강제로 부모로부터 빼앗아 백인 가정이나 정착촌에서 양육시켰다. 이유는 원주민 토착문화를 없애고 백인 사회에 동화시키기 위함이었다. (내선일체나 식민사학으로 대표되는 일제 치하의 민족말살정책의 서양판으로 보이는 것은 나뿐일까?) 이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가정파괴와 유괴를 승인해 주었다는 측면에서 용서할 수 없는 반인륜적 행태였다. 


정착촌을 떠나 1500마일이나 떨어진 부모를 찾아가는 영화 - Rabbit-proof Fence (2002) 


결국 2008년 케빈 러드 호주 총리가 원주민에게 공식 사죄했으나, 여전히 원주민들이 겪는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은 여전한 상태이다.


미국의 흑인 노예에 대한 배상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 이후로 매년 흑인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일반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2008년 미국 하원이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정책이었던 '짐 크로법 (모든 공공기관에서 인종간 분리하도록 의무화한 법)'에 대한 사죄를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몇 줄로 요약된 이 모든 잘못과 부당함에 대하여 미안하다는 말을 듣기 위한 노력은 몇 줄로 요약될 수 없다.

존 하워드 호주 총리는 원주민에 대한 공식 사죄를 거부하며 "현세대가 앞선 세대의 행위를 공식 사죄하고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했었고, 헨리 하이드 공화당 의원은 "나는 한 번도 노예를 소유한 적이 없다. 나는 한 번도 누구를 억압한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한 일을 내가 보상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했었다.


나의 책임은 내가 자발적으로 맡은 일만으로 한정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에는 집단적 책임 의식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전 세대의 잘못은 이전 세대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나의 삶의 서사가 필요하다. 나의 존재는 '지금 이 순간'의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기나긴 서사의 한토막으로 존재하고 그 서사의 궤적에 서서 삶을 바라보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과거는 단순하게 지나간 일이 아니라 나의 존재가 흘러온 서사 속 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현재 내가 누리는 기쁨, 슬픔, 가족, 친구, 직업... 이 모든 것들은 그 서사 과정을 통해 물려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집단의 잘못에 대해 사죄해야 하고, 우리 집단의 비극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조합 아니면 저 조합의 회원이다. 나는 이 친족, 저 부족, 이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내게 이로운 것은 그러한 역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매킨 타이어 - 덕의 상실 중> 




대한민국의 여성가족부가 어떠한 생각으로 위안부 - 여성을 성노예화했던 끔찍한 참상이자 비극적 사실 - 라는 이슈로 지탄을 받고, 거기에 대한 반성 대신 조롱을 보낸 기업에게 '가족친화적'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준 것인지 모른다. 


'가족친화 인증' 기업 자격을 받을 조건과 절차를 만족시켰기 때문이라 변명한다면 이 일을 하기 전 '이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것을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되묻고 싶다. '가족친화 인증' 기업을 검토하고 승인할 수 있는 그 누군가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흘러내려온 서사는 생각지 않고, 순간의 개인이라 생각했다는 것일까? 


대한민국의 역사와 서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조건과 절차만으로 가족친화적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외교통상이나 산업부도 아닌 여성가족부가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과 일본계 기업의 가족친화적이라는 가치를 양립시킬 수 있는 것일까? 나의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다.


"미안해"라는 말은 어려운 말이다.

진심을 담은 "미안해"라는 말은 정말 어려운 말이다.

"미안해"라는 말은 상대가 받아들여야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상대가 받아들일 때까지 "미안하다"라고 말해주길 바란다.

용서는 "미안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주는 사람이 해 주는 것임을 잊지 말고.


미안해



덧. 

시의성 있는 이슈에 대해서는 글을 쓰지 않으려 했는데 하필이면 쓰고 있던 글의 주제와 일치하는 사건이 터져버렸다. 

세 번을 지웠다가 다시 썼다. 쓰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감정이 격해져서 지웠다가 쓰길 반복했다. 

하는 수 없이 결국 책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가치중립적인 글을 써야한다고 수없이 생각했지만 쓰다보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 글을 뒤덮어버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9강 내용을 인용하고 각색하여 이 글을 썼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읽으시는 모든 분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