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막상 쓰다 보니 대한적십자사에서 공모하는 헌혈 장려 수기 같은 글이 되어버렸다.
운용기관과 전혀 무관하며, 개인적인 소감을 아무런 대가나 요청 없이 쓴 글임을 미리 밝혀둔다.
시작, 선물 그리고 보답
생명이었다.
내 아이가 태어났다.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이였다.
아이를 보고 오는 병원 복도에서 문득 세상이 너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였다.
그전까지 군대에서 두 번 헌혈해 본 것이 다였던 내가 갑자기 헌혈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이유는 이게 다였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왜 피를 나누겠다고 생각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세상이 나에게 생명이라는 선물을 주었기에, 나 또한 세상에 물질적인 것이 아닌 무엇인가를 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짧은 시간의 결심으로 헌혈을 시작하게 되었다.
두려움
일단 나는 주삿바늘과 피, 이 두 가지 모두와 친하지 않다. 아니 싫어한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미국 회사와 관련된 업무를 하고 있던 터라 해외 출장이 잦았기 때문에 헌혈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해외를 다녀온 후 국가에 따라 헌혈을 할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고, 특정 국가는 체류 기간이 길었을 경우 헌혈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두려움은 지금까지도 극복하지 못한 상태이고 (몇 년을 했지만 여전히 두려움이 크다. 점점 더 커져간다.),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빨리 끝내자는 심산으로 항상 전혈(피를 성분 별로 뽑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피를 그대로 뽑아내는 헌혈의 종류)을 했다. 가장 빨리 끝낼 수 있고, 한 번 뽑고 나면 8주 동안 다시 헌혈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약 2달간은 출장이나 다음 헌혈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겐 장점이었다.
Pros & Con
헌혈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건강에 좀 더 신경을 쓸 수 있다는 점이다. 헌혈을 하기 위해서는 먹지 않아야 할 약도 많고, 치과치료나 내시경을 일정 기간 이내에 받은 적이 있어서도 안되고, 건선이나 여드름 약도 복용하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1년 동안 전혈을 4~5번 했다면 1년 내내 특별하게 아픈 곳 없이 건강하게 지냈다는 뜻이 된다. 덤으로 혈액검사 결과도 매번 확인할 수 있으니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좋았다.
이런 가시적인 부분이 아니더라도 헌혈을 하면서 느끼는 가장 좋은 점은 세상은 참 따뜻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주변에 아무도 헌혈을 하지 않는 듯 하지만 막상 헌혈의 집에 가면 항상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코로나로 인해 혈액이 부족하다는 문자를 받고 간 헌혈의 집은 예상치 못하게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예약을 했음에도 1시간 가까이 기다리고서야 헌혈을 하고 나오면서 세상이 모질다 해도 아직 베푸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일면식도 없지만 이유가 어찌 되었건 자신의 것을 나누려 오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조금 더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안타깝지만 좋은 점만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다. 첫 번째가 운용기관(대한적십자사)에 대한 불신이 생각보다 깊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피를 헐값에 사서 비싸게 판매한다는 인식이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수차례 경험했다. 그래서인지 운용기관의 농간에 빠져 피를 빼앗기는 불쌍하고 아둔한 사람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 두 번째로 헌혈용 주사 바늘은 굵고 튼실해서 헌혈을 하고 나면 구멍(?)이 잘 아물지 않는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지혈과 상처가 아무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어져 가끔씩 며칠간 운동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곤 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 글은 절대 '헌혈이 좋으니 하세요'라는 내용이 아님을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 헌혈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판단을 내릴 만큼의 의학지식도 없고, 운용기관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를 판단할 만큼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헌혈을 해 온 몇 년간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헌혈을 해 나간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가질 수 있었고, 작은 부분이지만 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성취감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좋아"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무엇인가 세상에 돌려주는 방법 중 하나로 헌혈은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부유하지 않아도, 시간이 많지 않더라도, 건강하기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꾸려갈 수많은 다른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헌혈을 선택했고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