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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Dec 24. 2020

상처주기 가장 쉬운 방법

나는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입사를 해서 내가 무엇을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시점에 갑자스레 출장의 멤버로 끼이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같은 팀의 여느 다른 엔지니어들과는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고, 공교롭게도 옆 파트의 라이선스 담당자가 갑자기 집안 사정으로 전출을 가는 바람에 그 일을 떠맡게되었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잠시 발을 들였던 프로젝트가 엉망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현장에서 몇 년을 보내기도 했다. 이 과정들은 힘들었지만 덕분에 내 경험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넓어져 있었고, 확고한 나의 영역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운이 따라준 덕분에 직장 내에서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만난 수 많은 사람들을 보면 상처 주는 사람들의 속성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표현의 거침이 문제가 아니었다.

타인에게 항상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문제를 지적하는 철조망'을 온몸에 두르고 다니는 듯했고, 그것을 자신의 강점 내지는 날카로운 지성의 표현이라 믿는 듯했다.


무지의 소산으로 틀린 것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치부하기엔 사회적으로 인정한 교육과정의 정점에 선 이들도 종종 이러한 '철조망'을 두르고 타인에게 상처 주는 일이 많았기에 '지성'의 무지함은 원인이 아닌 듯했다.

어쩌면 뛰어난 지성을 상대의 허약함을 찾는데 쓰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논쟁이 총알처럼 빗발치는 날이 선 회의장에서 상대의 약점을 잡아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것은 필요하지만, 일상 영역까지 그러한 행동 패턴이 물들어 있다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아.... 쟤 도대체 왜 저러냐?"

모여있는 이들이 현재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의견을 내기가 무섭게 반박할 '거리'를 찾아내는 그에게 질려 나가 버리는 선배가 던진 말이었다.

현재 닥친 문제에 대해 저마다 의견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전략을 담당하는 회사의 두뇌라 자부하는 그는 끝없이 '합리적인 의심'을 제기했고, 이것을 태클로 받아들인 이들은 하나둘씩 질린 표정으로 입을 닫거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타인의 의견에서 부족한 부분이나 논리적인 허점을 빠르게 찾는 것이 자신의 높은 지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회사의 두뇌'는 끊임없이 왜 안되는지에 대해 설명을 했고, 20여 명이 모여 5시간이 넘게 진행된 회의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무산되었다. 남은 것은 상처뿐이었다.


"야 이XX야~! 너 죽을 수도 있어."

밸브를 잠그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데 욕설과 함께 뛰다시피 온 그 분은 내 손에서 공구를 뺏아들고 웅크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에 자신이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이 일이 왜 위험한지와 무엇을 잘못 했는지 다음부터 자신을 불러서 2인 1조로 함께 해야 하고, 일을 정확하고 안전하게 하려면 어떤 교육을 미리 받아야 하는지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알려주었다. 매번 욕을 듣고 혼이 났지만 모든 것이 받아들여졌다.

그가 하는 모든 지적에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지가 명확하게 포함된 피드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표현의 거침은 문제가 아니었다. 때에 따라 표현은 거칠어져야만 했다. 내가 위험에 처하기 전이라면 더더욱.


표현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지적만 한다'는 것이었다. 더 좋은 방안 그리고 그것이 왜 더 좋은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 채로 상대방의 잘못만을 드러내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나를 올리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깎아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남을 깎아내려 나를 돋보이게 하려는 행위는 표현이 어떠하던 결국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 마련이다.


스스로 상처를 입었다고 혹은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고 느낀 대부분의 이들의 관계 속에는 타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상하관계가 뚜렷한 직장 속에서 더욱더 크게 드러났다. 더 많은 경험을 했기에,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기에 혹은 더 높은 직위에 있기에 지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당한 지적을 하고 그에 대한 해결방안이나 개선안이 포함된 피드백을 주는 것은 권장되어야 하는 행위이나, 지적만을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제는 지적받는 일이 거의 없어질 만큼 오랜 직장 생활을 했지만 아직도 해결책이나 개선안 없이 지적만을 하는 경우를 보면 이해할 수가 없다. 


야만의 상처

직장 밖을 벗어나도 너도나도 상처를 주기 위해 '철조망'을 칭칭 두르고 다니는 이들이 있다. 감정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논리와 지성이라는 가면을 뒤집어 씌어 '합리적인 지적'으로 둔갑시킨다. 어떠한 일에 반대를 하고 싶다면 '너의 이러이러한 점이 잘못되었어'라고 말하기보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나이를 무기 삼아, 권력과 권위를 무기 삼아 자신의 싫음을 무엇인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으로 위장해 타인을 억압하고 상처 입히는 모습이 역겹다. 나의 감정을 실어 부당하게 대하더라도 상대가 나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가하는 감정의 배설로서의 '지적질'은 야만스러움의 산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상처를 주기 가장 쉬운 방법은 타인을 향한 대책 없는 지적질을 하는 것이다.

당신이 지적질을 하는 사람보다 나이가 많고, 높은 직위이며, 더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더욱 효과적이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가장 쉬운 방법이자, 당신의 인간성을 스스로 짓밟을 수 있는 가장 야만스러운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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