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
2년 전 출간되었을 당시 조금 읽다가 최근에 미팅 참고도서로 다시 꺼내 읽었다. 처음에 읽었을 땐 책의 세심한 만듦새에 감탄했는데, 다시 읽으니 책 내용과 구성이 흠잡을 곳 없을 정도로 좋았고 마음에 닿는 문장도 많았다.
책은 그 안에 이야기가 오랫동안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집과 같다. 책을 만든다는 건 안전한 종이를 내장재로 써서 튼튼한 제본으로 골조를 쌓아 올린 뒤 아름다운 인테리어로 마감을 하는, 한 책의 집을 짓는 일과 비슷하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수선한다는 건 오래된 집을 보수하거나 리모델링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192쪽
사람의 만남에도 연이 있듯, 특정 경험을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물며 직업도 그냥 다가오는 건 아닌 거 같다. 이 책을 쓰신 재영 책수선님도 매우 특별한 직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 대학교에서 순수미술과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셨는데, 미국의 대학원에 진학해 세부 전공으로 ‘북아트’와 ‘제지’ 분야를 선택했고, 지도 교수님의 조언으로 책 수선가 일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당시 다닌 학교는 커다란 건물 지하 한 층 전부를 ‘책 보존 연구실’로 사용하고 있었고(미국 내 대학교 중에서도 손으로 책을 고치는 연구실은 재정 문제로 몇 곳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그렇게 3년 6개월 동안 1,800권 이상의 책을 수선하셨다. 이 기간 동안 꾸준히 연습하며 복잡한 기술들을 빠르고 탄탄하게 배워갈 수 있었고, 지금 독립된 책 수선가로 살아갈 수 있게 되셨다고 한다.
작가님께서 책 수선가라는 직업을 갖게 되신 이야기가 한 편의 영화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작가님뿐 아니라 각자에게도 특정 직업이 찾아오는 건 운명 같은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도 우연히 방송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지금 책 만드는 일을 하며 내가 지나온 과정의 연결성을 떠올려봤다. 나는 계속 ‘누군가의 삶을 찾아 담아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다시없을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담아내야 하기에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중압감이 큰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는데 재영 책수선님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계셨다.
대체할 수 없는 가치의 무게 때문에 작업을 하면서 매 순간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수선을 끝내고 났을 때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책이 가진 기억의 울림 역시 크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가면서 책 주인과 책의 연결고리를 다시 튼튼하게 엮는 이 직업에 대해 나 역시 이전과는 다른 마음과 태도를 다지고 있다. -104쪽
책을 읽는 내내 어떤 책을 수선 맡기면 좋을지, 어떤 책이 내게 가장 중요할지 생각해봤다. 수선을 맡기고 싶은 책은 평생 소장하며 여러 번 곱씹어 읽고 싶은 책일 테다. 내가 가진 책 중에서는 살짝 누렇게 변색한 것 말고는 아직 심하게 손상된 책은 없지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였다. 이 책의 문장들을 인생 명언처럼 되새기기도 하고, 삶의 전환점이 필요할 때마다 들고서 여행을 떠나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워낙 베스트셀러여서 망가지더라도 아직은 쉽게 구할 수 있을 거 같다.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에는 책 수선 말고도 할머니의 일기장이나 아끼는 책갈피, 친구들이 함께 쓴 여행 일지 등을 수선한 이야기가 나온다. 가장 감동적인 사례는 결혼 앨범 수선 이야기였다. 의뢰자분께서는 결혼했던 당시 형편이 좋지 못해 작고 습기가 많은 집에 살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앨범이 많이 상했는데 3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내내 마음 한편에 이 망가진 결혼 앨범이 안타까웠고, 기사를 통해 재영 책수선을 알게 돼 책을 맡기셨다고 한다. 수선해서 33주년 결혼기념일에 아내에게 깜짝 선물로 주고 싶다고 하셨는데, 얼마나 앨범이 상했는지 곰팡이 흔적으로 가죽이 뒤덮여 작가님께서는 라텍스 장갑과 보안 안경, 전용 마스크, 일회용 머리캡까지 챙겨 쓰고 수선 작업을 하셨다고 한다.
완성된 결혼 앨범 사진이 책에 담겨 있는데, 아내분이 가장 좋아하는 안개꽃이 백박과 금박으로 표지에 수놓아져 있고, 안개꽃과 잘 어울리는 연한 갈색 가죽이 새롭게 씌어져 엄청나게 근사해 보였다.
책이 아니라면 나는 엄마에게 최근에 받은 ‘아기수첩’을 나중에 의뢰하고 싶다. 종이는 제법 해졌는데 제본은 아직 튼튼하다. 아기수첩의 첫 장엔 출생기록이 담겨 있는데, 내 이름과 부모님 성함, 집 주소, 태어난 시간, 체중과 신장 크기, 혈액형까지 태어났을 당시의 내 모든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맨 뒷장엔 엄마에게 각종 당부를 하는 어느 간호사분의 꼼꼼한 메모가 적혀 있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어느 시간 누군가가 나를 위해주는 마음이 담겨 있어 볼 때마다 힘을 얻는다. 이 ‘아기수첩’은 책장 한편에 놓아두었는데, 더 오래돼서 언젠가는 펼치기 힘들어져도 걱정 없을 거 같다. 재영 책수선에 의뢰하면 되니까.
지금 글을 읽고 계신 분들도 앞으로 망가진 책이 생긴다면 마음속에서 책 수선이 한 번쯤 떠오르길, 우리 주변에 또 한 번의 새로운 기회를 가지는 망가진 책과 헌책들이 점점 더 많아지길 바라본다. 그 책에 소중한 추억이 있다면 다시 오랫동안 튼튼하고 아름다울 수 있도록, 특별한 감흥이 없다면 책 수선을 통해 새로운 추억이 시작될 수 있도록, 재영 책수선은 언제나 망가진 책들을 환영하며 기다리고 있을 테니. -266쪽
이 책을 읽으며 한편으론 반성도 하게 됐다. 이렇게 한 권 한 권이 소중하고 의미 있는데, 책 만드는 일을 하면서, 나에겐 역설적으로 책 한 권 한 권의 중요성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 같다. 집에도 회사에도 책이 잔뜩 있기에 내가 무슨 책을 가졌는지 모를 때가 많고 종이책뿐만 아니라 온라인 서점에서 산 전자책, 밀리의 서재 구독 등 다양한 형태로 책을 접하면서 그냥 내려받고 몇 초간 살펴보다 그걸로 끝나는 책들도 있다. 어쩌면 한 권의 책에는 누군가가 평생 이룬 깨달음이 담겨 있을 수 있는데, 1분도 안 되는 시간 그 결실을 다운받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책 한 권엔 쓰고 담고 만든 사람들의 노고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나 역시 그 책들을 올바로 대접하고 있지 않을 때가 많다. 편리한 서비스는 장점으로 잘 활용하되, 한 권에 담긴 특별한 가치를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 책을 참고도서로 소개하며 미팅을 마치려는데, 나를 믿고 글을 주겠다고 하신 작가님께서 “엄마가 좋아하시겠어요”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뭉클해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직업 전환을 하신 분이었고, 나와 이야기 나누는 회의실 한편엔 어머니의 소중한 기억이 담긴 작품이 걸려 있었다. 오랜만에 어떤 마음으로 책을 만들어야 할지 다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던 시간이었다. 모든 책에는 저마다의 역사가 담겨 있다. 내가 만드는 책도, 내가 읽는 책도 모두 소중히 아껴줘야지.
책을 대하는 작가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좋았던 문장들.
망가진 책 앞에서는 어느 때보다 집중을 하게 되는데 그 집중력으로 뜯어진 표지의 올을 하나하나 풀어 다시 잇고, 0.5밀리미터의 오차도 나지 않도록 정확히 치수를 잰다. 상태가 심각하게 좋지 않은 책에 붙어 있는 테이프들을 제거할 때면 휴대폰은 잠시 비행기 모드로 바꿔놓을 만큼 한껏 예민해지기도 한다. 이런 것들도 일종의 직업병이려나? 하지만 이런 긴장감은 대체로 내게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외면하거나 피하고 싶지 않다. 덕분에 실수하지 않고, 꼼꼼하게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니까. -229쪽
보통 의뢰인들이 맡기는 책에는 크든 작든 그 책을 향한 각자의 고유한 애착이 담겨 있다. 그럼 나는 그 애착의 방향에 따라 책의 기억을 잘 살피고 가꾸는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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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께서 책을 관리할 때 누누이 강조하시는 꿀팁 하나를 전하면, 책에 ‘테이프’는 절대 붙이지 말자. 테이프는 종이의 적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