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워낙 유명했던 책인데, 늘 언젠가 읽어야지 하고 막연히 미뤄두기만 했다. 이 책을 꼭 읽어야만 한다고 굳게 다짐하게 된 계기는 고명환 님이 독서에 관해 쓴 책 《나는 어떻게 삶의 해답을 찾는가》를 읽고서다. 이 책에는 《스토너》를 소개하는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데, 고명환 님이 김영철 님이 진행하는 라디오에 출연했고, 광고가 나가는 사이 두 분은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영철이는 눈을 반짝이며 넌지시 묻는다.
“형, 혹시 《스토너》라고 알아?”
“존 윌리엄스, 스토너?”
내가 대답하는 순간 우리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고 우리는 동시에 이렇게 외쳤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이 한마디에 영철이와 난 수년간 만나지 못한 어색함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라디오 중간중간 음악이 나가는 동안 ‘넌 무엇을 기대했나’에 대해 눈물을 글썽이며 대화를 나눴다. 죽을 때까지 함께한다는 동지가 되는 순간이었다.
- 《나는 어떻게 삶의 해답을 찾는가》 202~203쪽
‘넌 무엇을 기대했나?’라는 대사의 의미가 무척 궁금했고 나도 그 감동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 대목이 언제 나올지 두근두근하며 읽어나갔다.
이 책은 소설이다. 주인공 스토너는 미주리 대학교 영문과의 종신 교수로 평생 진지한 태도로 자신만의 공부를 해나간다. 스토너의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는 ‘강물 같은 사람’이다. 흐르면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고 거스르지 않는 사람. 주변의 악인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말든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며, 주어진 소명과 일상을 묵묵히 수행해 나갈 뿐이다.
이 책의 번역가님께서는 옮긴이의 말에서 스토너를 ‘선하고 참을성 많고 성실하지만 현명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 불굴의 용기와 지혜로 난관을 극복하기보단 조용히 인내하는 사람, 삶을 관조하는 자’라고 이야기하셨다.
이 책은 도입부에 아예 스토너의 삶 전반을 객관적인 시점에서 평가하며 시작한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65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스토너의 성격처럼 사람들에게 천천히 알려졌다. 거의 50년이 흐른 뒤에야 미국이 아닌 유럽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존 윌리엄스 작가는 이 소설을 슬프다고 이야기하는 독자들의 반응에 오히려 놀랐다고 한다. 자신이 보기에 스토너의 삶은 아주 훌륭했기 때문이다. 존 윌리엄스 작가는 스토너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그 일에 어느 정도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스토너가 나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둡고 고요한 방 안 밝은 빛이 스미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 부분들이 있다. 잔잔한 강물 같은 스토너가 자신도 모른 채 무언가를 단단히 결심하는 순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농사일을 도울 거라고 당연히 여기는 부모님께 집에 돌아가지 않고 대학에 남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순간, 자신이 좋은 교육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자각하는 순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깊이 깨닫는 순간…. 스토너는 그 결심들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두 분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군.” 슬론이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모르겠나, 스토너군?” 슬론이 물었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달빛 속에서 알몸을 드러낸 채 회색을 띤 은빛으로 빛나는 그 순수한 기둥들은 신전이 신을 상징하듯, 스토너 자신이 받아들인 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투에 자신감이 붙었고, 그의 내면에는 따스하면서도 단단한 엄격함이 힘을 얻었다. 10년이나 늦기는 했지만, 이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그는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왔지만, 이제는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대담하게, 종내에는 자랑스럽게.
그가 이렇게 가구를 수리해서 서재에 배치하는 동안 서서히 모양을 다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책을 읽으며 얼마 전 동료들과 점심시간에 본 전시가 떠올랐다. 현대 예술작품으로 하루에 한 번 전구가 떨어져 깨지도록 설정되어 있고, 그렇게 전구는 눈에 띄지 않는 속도로 아주 조금씩 추락해간다. 이 전구에는 가끔 희미하게 불이 들어오는데 위의 문장들이 이 전구처럼 스러져가는 스토너의 삶에 조금씩 빛을 발하는 순간들을 표현해주는 것 같았다.
약간의 스포일러를 하자면 앞에서 말한 “넌 무엇을 기대했나?”라는 말은 스토너의 삶이 소멸해갈 때쯤, 책의 거의 끝부분에 나온다. 스토너가 생을 다 통과한 후에 스스로에게 건네는 대사이기에, 이 문장이 주는 울림을 나도 느꼈다. 이 책을 다 읽고서 가장 크게 받은 감동은 누군가의 인생의 모든 과정을 생생히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직업을 얻고 가족을 일구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자신에 대해 점점 깨닫게 되는 스토너의 삶 전체가 396쪽에 걸쳐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스토너처럼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또 소멸할지 가늠해보게 되었다.
무엇이든 다 될 수 있을 것만 같아 혼란스러웠던 스무 살 무렵을 통과해 지금을 맞았다. 이전보다 인생의 선택지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불행하지 않다. 오히려 평화롭게 흘러가는 하루가 뭉클하도록 기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난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을까?'라는 질문은 연말을 떠올리게 되는 지금 머릿속에 가장 많이 맴도는 생각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께도 여쭙고 싶다.
무엇을 기대하며 살고 있나요?
눈물이 나도록 기쁜 날들과 웃음이 나도록 슬픈 날들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모두 저 속절없는 0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스토너처럼, 삶이라는 서술어의 보편 주어 같은 이 사람 윌리엄 스토너처럼.
- 신형철(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