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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심과 열심 Jul 12. 2023

망해버린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건가요?

《스노볼 드라이브》

이번 주 내내 비가 내릴 예정이라고 한다. 어제도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장마철 높은 습도와 무더위를 견디며 읽고 싶은 책을 골랐다. 조예은 작가님의 《스노볼 드라이브》.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눈’이 소재이기에 왠지 지금 날씨와 정반대의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았다.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믿고 보는 조예은 작가님의 작품이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아래부터는 소설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일 년 내내 녹지 않는 눈이 내린다면

소설에서는 초여름인 6월의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 눈의 특징은 녹지 않는다는 거다. 또 기이하게 반짝여서 마치 방부제 가루 같기도 하다. 게다가 맞으면 발열·구토·가려움·발진·호흡곤란이 오고 장시간 노출되면 치명적이다. 이렇게 눈은 일 년 내내 계속 내리고 쌓여 녹지 않는다. 책 제목이 암시하듯 마치 ‘스노볼’에 갇혀 있는 세상이 된다.


어디를 가더라도 꼬챙이처럼 바짝 말라비틀어진 나무와 전신을 꼼꼼히 가린 채 눈을 치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농작물과 과일, 채소 같은 건 너무 귀해서 아무나 먹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45쪽


세상이 망해도 사람은 살아간다

책은 ‘모루’와 ‘이월’이라는 이름을 지닌 두 인물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등장한다. 두 사람은 중학교 동창으로 그리 친하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사건으로 서로 엮여 있다. 모루는 자신이 살아가는 유일한 존재 이유였던 실종된 이모를 찾고, 바로 이월이 이모의 마지막 거래 상대였다. 결국 둘은 녹지 않는 눈이 7년째 내리는 세상에서 이모를 찾기 위한 여정을 함께 떠난다.      

소설은 특수 폐기물 매립 지역으로 선정된 ‘백영시’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데, 여기서 특수 폐기물이란 ‘눈’을 의미한다. 버려진 도시에는 ‘특수 폐기물 처리 전문가’라는 일자리가 선심 쓰듯 만들어지고, 갓 스물을 넘긴 모루는 “매일매일 도착하는 무수한 눈을 태우고, 태우고, 또 태우는” 그 일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등골이 오싹했던 건 세상이 이렇게 망해버려도, 더는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그 지루한 현실을 딛고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거였다.


이 눈은 언제까지 내릴까. 멈추는 날이 오기는 할까.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갑자기 궁금해지는 것이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이 망할 눈이 그친다면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데 이전의 일상이 어땠더라?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나는 이제 돌아갈 곳도 도망칠 곳도 없는데. –74쪽     
눈은 계속 왔다. 갑자기 퍼붓듯 쏟아지고 있었다. 원래도 하얀 눈 소각장이 꼭 백야라도 된 것처럼 온통 하얗다. 이게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세상이었다. 도시, 사람, 짐승, 쓰레기, 진실, 그런 것들도 결국엔 눈에 파묻히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마주하는 풍경은 같을 것이다. 온통 설원인 세상. -209쪽
이상하게 변해 버린 세상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 같은 건 아주 별 볼 일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건 지금 숨을 쉬고 있느냐, 그뿐이며 아무도 숨을 뱉어 내는 인간의 속을 세세히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궁금해하지 않는 인간의 삶은 지루하다. -37쪽     


선을 넘는 주인공들

처음 읽은 조예은 작가님의 작품은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이라는 장편소설이었다. 제목 그대로 뉴서울파크라는 놀이동산에 젤리장수가 등장해서 결국 대학살이 벌어지는 내용인데, 읽고 나면 핏빛 이미지가 아니라 달큰하고 끈적하게 세상이 녹아내리는 이미지가 강렬히 남는다.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돼 도저히 멈추지 못하고 한자리에서 다 읽었다. 모든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선명하게 느껴졌고 구성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시작으로 조예은 작가님의 작품을 하나씩 전부 읽어보자고 다짐했고, 얼마 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작가님을 뵈었다.   


가운데가 조예은 작가님, 오른쪽이 이은진 PD님이다.


《칵테일, 러브, 좀비》 이야기를 함께 구상하신 안전가옥 이은진 PD님과 북토크를 하셨는데, 사전 예약을 하지 못해 앞줄에서 서서 들었다. 당시 나누셨던 이야기 중에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은 건 “조예은 작가님의 소설 속 캐릭터들은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고 달려 나가 아예 선을 넘어버린다”는 거였다.

작가님은 “현실의 부조리를 허구의 세계에서 해소하고 있다”고 하셨다. 귀여운 인상이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강렬한 서사를 뿜어내시는지 놀라울 뿐이다.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은 《칵테일, 러브, 좀비》에 등장하는 네 편의 이야기 중 마지막에 담긴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를 가장 좋아한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 모든 게 맞물려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몸에 전율이 인다.


현실에 닿아 있는 디스토피아 세계

지난 주말 동안 《스노볼 드라이브》, 《칵테일, 러브, 좀비》 외에 《트로피컬 나이트》까지 세 작품을 내리읽었다. 《트로피컬 나이트》 속 단편 소설인 〈가장 작은 신〉에도 기후 문제로 인해 세상이 멈춰버린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먼지 폭풍’이 일어나기에 주인공은 절대 문밖을 나서지 않는다.      

작가님께서 《스노볼 드라이브》를 처음 쓰기 시작하신 것도 이상 기후라는 단어가 유난히 와닿는 계절인 여름이었고, 주말마다 빗소리를 들으며 일하는 곳 휴게실에 누군가 가져다 놓은 장식품을 보고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셨다고 한다.      


폭우도, 폭설도 많은 한 해였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눈이 그치지 않았듯이 우리 세상이 어느 날 갑자기 온화해질 리는 없지만, 또 이미 착실히 이상 징후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그 속도를 늦출 수 있도록 노력은 해 봐야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바로 이곳이니까요.
- 작가의 말, 227~228쪽

《스노볼 드라이브》에는 두 분의 추천평이 실려 있는데, 이마저도 너무 좋아서 그대로 옮긴다.


이 소설은 거듭해서 말해 준다. 멸망을 눈앞에 두고도 사실은 죽지 못해 꾸역꾸역 살아가야 한다고. 그러니까 그건 우리가 모두 외면하는 멸망의 진실이다. 그런데 스노볼 드라이브의 아름다운 순간은 모루와 이월이 달리기를 선택하는 장면들에 있다. 그들은 세계를 포기하기 위해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이 끔찍한 세계 속에서도 함께 있을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떠난다. 모루와 이월의 여행을 따라가면서, 그들이 설원 위에 긋는 무수한 자국들을 상상한다. 또다시 그 위에 눈이 쌓이더라도, 오직 내달리는 사람의 열기만이 이 세계를 조금씩 녹인다는 것을 이제는 어쩐지 알 것 같다.
- 추천의 말, 김초엽(소설가) 229~230쪽
녹지 않는 눈, 전 세계를 덮어 버리는 눈, 일상을 망가뜨리며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 사람과 동물과 쓰레기와 진실을 모두 감추어 버리는 눈, 그 재난의 한가운데에도 반짝이는 마음들이 있다. (…) 이 소설에는 재난으로부터든, 폭력으로부터든, 심지어 사랑으로부터든, 상처받지 않을 수 없는 이 세계에서 흠집을 무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다. 돌이킬 수 없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이 세계에서 부서지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용기. 사방이 눈으로 막혀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는 세계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아 더욱 단단해질 수 있는 용기. 스노볼 드라이브는 바로 그 용기에 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독자라면 목적지가 어디든 그 용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라면 영원히 달려 보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다.
- 추천의 말, 인아영(문학평론가) 232~233쪽



작년 이맘때 폭우가 내려 지하 주차장에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가장 평온해야 할 집 안에서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를 처음으로 느꼈다. 여전히 마스크를 볼 때면 그간의 시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소설처럼 녹지 않는 눈이 내리진 않더라도 많은 비가, 강렬한 태양이 언젠가 우리를 스노볼 세상 안으로 가둬버릴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 누리고 있는 일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자각하고 있어야, 조금이라도 변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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