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연말이 되니 생각이 많아진다. 올해 나름 열심히 해왔다고 자부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뚜렷한 성과가 없는 것 같다.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 나를 의심하게 된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에 다시 스멀스멀 올라올 무렵 알록달록한 그림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그림책의 줄거리는 이렇다. 이 책의 주인공 ‘로’는 비눗방울에 이끌려 밖으로 나간다. 구름인 듯 하늘에 올라가보기도 하고, 꽃들을 따라 꽃밭에 숨어보기도 하며, 조약돌인 척 시냇물에 기대보기도 한다. 언젠가는 나만의 색을 찾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서 ‘이렇게 돼 볼까? 저렇게 돼 볼까?’ 하는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깨닫는다. 원래 자신은 무지개처럼 알록달록했음을, 이미 모든 색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것이 될 수 있음을.
‘로’의 모험에는 이 책을 쓰신 이슬로 작가님의 이야기가 투영되어 있다. 이슬로 작가님은 매체나 소재에 구애받지 않고 미술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브랜드 디렉터, 캐릭터 디자이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종횡무진 활동하는 아티스트다.
작가님께서는 어린 시절 모든 루틴이 낙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을 만큼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언제부턴가 세상에 자신을 소개해야 할 때마다 고민이 되셨다고 한다. 특정 직업으로 자신을 정의하거나 뚜렷한 목표가 있는 꿈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고민 끝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뭐든 새롭고 분명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한 채 4개월가량 혼자 시골에 내려가 시간을 보내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게 그림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셨다고 한다.
그렇게 무엇이 되지 않아도, 아무것도 이루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어린아이처럼 신나게 그림을 그리며 지냈고, 어느새 사람들은 하나의 직업으로 설명되지 않는 작가님의 모습을 오히려 ‘독보적’이라고 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빨강인지 노랑인지, 빨강이라면 어떤 빨강이고 어떻게 하면 더 예쁜 빨강이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느라 애쓰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고요. 그리고 여러 가지 색이 알록달록 조화를 이루는 무지개 같은 삶을 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작가님의 이야기를 접하며 스무 살 무렵의 내가 떠올랐다. 대학교를 편입한 뒤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는 현실을 동기들보다 늦게 자각하고 압박감을 느꼈을 무렵 매일 신문을 뒤적였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직업에 관한 작은 단서 조각이라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당시 막막했던 시간 동안 내 안에 뭐가 있는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먼저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저 사회에서 직업으로 불리는 것들에 나를 끼워 맞추는 데 급급했던 거 같다. 지금 되돌아보니 이 부분이 가장 후회가 된다.
운 좋게 성수동에서 열린 이 책의 북토크에 참여하게 되었고, 퇴근 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작가님께선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림 설명을 상세하게 해주셨는데, 덕분에 로의 상황이 더 잘 이해되었다. 작가님께선 로가 특별한 이유 없이 밖으로 나가는 게 중요하며, 로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후 집 안이 이전보다 알록달록하게 바뀌는데, 내가 궁금하니 안 보이던 풍경도 보이는 거라고 말씀해주셨다. 로가 겪어왔던 경험들이 뒤에 무지개 색의 순서로 표현된 것도 작가님의 설명 덕분에 알게 되었다.
원래 작가님의 실제 성함은 ‘이슬’인데 이름이 slow를 의미할 수 있도록 ‘로’를 붙여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이름을 직접 지으셨다고 한다. 이날 작가님께 나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다. 작가님께서는 자신을 ‘프린세스 메이커’ 게임처럼 소중하게 키우려고 애쓰신다고 한다. 늘 ‘균형’을 염두에 두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혹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선 그림을 그리는 게 싫어질까 봐 작업하지 않으신다고 한다.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서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이 글귀가 다시 방황을 시작하려던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오히려 무엇이든 시도하고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덕분에 여러 타래가 얽혀 있던 마음이 조금은 가뿐해졌다.
정글짐에 오르듯 차근차근 쌓인 그 시간은 결국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경험이 되죠.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이렇게도 저렇게도 살아 보며 방황하던 과거의 저에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독자에게 로의 이야기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전하고 싶어요.
“너 지금 예쁘게 물들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