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연 그만큼 성장했을까?
1,768페이지는 내가 올해 만든 책 페이지의 총합이다. 최근에 마감한 책까지 올해 총 6권의 책을 편집했다. 국내서 3권, 외서 3권. 누군가에겐 이 6권이 많게 느껴질 수도, 적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최소 2달에 한 권을 만들었다는 의미니까. 게다가 뒤에 세 권은 거의 한 달 간격으로 연달아 완성했던 거 같다.
책 만드는 일의 장점 중 하나는 작업의 결과물을 물성으로 만질 수 있다는 거다. 이렇게 매해 마지막 책까지 실물을 손에 쥐고 나면 만감이 교차한다. 올해도 결국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내 한 해의 많은 시간이 여기에 담겨 있구나 싶어서.
올해 마감한 책은 경제경영, 자기계발, 인문, 에세이 분야를 아울렀고, 책의 주제 또한 브랜드, 조직, 말투, 독서, 심리, 여성으로 다양했다. 연차가 쌓이면서 조금 더 손이 가는 분야의 책이 생기지만, 그럼에도 매번 새로운 주제의 책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꿈틀댄다. 편집자는 기획 단계뿐만 아니라 초고를 피드백하며 원고를 완성해가는 과정 그리고 최종 원고 단계에서도 거의 두 달 동안은 해당 책을 집중해서 편집하기에 그 주제에 깊이 몰입하게 된다.
언제부턴가 ‘많이 팔리는 책을 만들어야지’ 하는 욕심 한 편엔 ‘만드는 시간 동안 많이 배우고, 즐겁게 작업하며, 그 시간이 내게도 의미 있게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이렇게 책을 만들면 관심사도 경험도 확장된다. 책에 소개된 물건을 직접 따라 사보기도 하고, 원고에서 제안하는 방법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경험해보려고 한다. 내가 깊이 이해해야 실수 없이 전할 수 있을 거란 믿음에서.
올해 6권은 내게 이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나와 첫 책을 출간하신 작가님의 후속작을 작업해보았고, 힘들었던 나와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획한 책도 있고, 꼭 한번 전하고 싶었던 주제의 책도 있으며, 적극적인 편집을 시도한 책도 있고,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세상에 내보낸 책도 있고, 디자이너님과의 좋은 케미로 기대보다 훨씬 만족스럽게 완성된 책도 있다.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업계의 원로 같은 출판사 대표님께서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은 마치 패션 디자이너가 패션쇼를 준비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말씀해주셨는데, 마감할 때마다 이 생각이 났다. 마감 데이터를 올리고 그간의 과정을 떠올리면 완성된 결과물이 놀랍기만 하다. 이 길 저 길 미지의 세계를 막막히 탐험하다, 나침반을 습득해 한 방향을 따라 열심히 달려가다, 다행히 종착지를 찾아 무사히 안착한 느낌이다. 중간에 기분 좋은 우연도 만나는 힘들지만 설레는 모험 같다.
작업한 책의 모든 페이지는 내게 특별하다. 매 페이지를 잘 구성하려고 노력했고, 컴퓨터 화면으로 교정본 것을 제외하고도 원고를 디자인해서 앉힌 후에도 최소 3번 이상은 읽으며 교정교열을 보았다. 교정지를 본다는 건 책을 읽는 감각과는 다르다. 오타도 없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한 문장이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없도록, 되도록 쉽게 읽힐 수 있도록 노력한다. 때문에 이 1,768페이지에는 한 문장, 아니 글자 하나하나에도 내가 애쓴 흔적이 담겨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안다. 나에겐 치열한 전장이었음을. 끝내 타협하지 않았음을.
책 만드는 일이 이전처럼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점점 팔리지 않는 책들을 바라볼 때면 슬프다. 공허하기도 하고. 서점 매대에서 결국 내가 만든 책이 빠져 있는 걸 마주할 때, 하루에 신간이 한 권도 팔리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작가님의 오랜 인생의 결과물이 나로 인해 묻히는 거 같을 때 커다란 슬픔을 느낀다.
속상한 마음에 허덕이면서도, 신간이 나오면 매일 습관적으로 독자평을 검색한다. 구간도 주기적으로 독자평을 찾아본다. 이 책이 결국 누군가에게 어떻게 닿았는지, 나의 애씀이 과연 쓸모가 있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게 누군가에게 내 마음이 의미 있게 전달되었다는 걸 발견하면 뛸 듯이 기쁘다. 이렇게 누군가의 평이 지쳐 있던 나에게 커다란 용기를 건네준다. 아무 걱정 없이 다시 새롭게 시작해도 된다고.
독자평 외에도 한 권 한 권엔 함께 작업한 사람들과의 몽글몽글한 추억이 배어 있다. 올해 한 디자이너님과 우연히도 3권의 책을 함께 작업했는데, 얼마 전 마지막 책을 마감하며 인쇄 감리를 볼 때 이 말씀을 드리니, 나보다 연차가 높은 디자이너님께서도 같은 편집자와 한 해 3권의 책을 작업한 건 처음이라고 하셨다. 누군가에게 처음인 사람이 되었다는 게 은근히 기뻤다. 내가 기획했을지언정 나 혼자 만든 책도, 나 혼자 애쓴 책도 없다. 만약 혼자서 작업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형태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각자의 애씀과 서로를 향한 응원이 연결돼 어엿한 한 권의 작업물로 완성되는 이 과정이 좋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일이 수월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선배들이 해준 말은 사실이었다. 마감일에 긴장해서 점심도 못 먹던 내가 이제는 마감일에 강연도 듣는다. 이 책에는 충분한 시간을 쏟았다는 믿음이 있으니까. 올해 작업한 1,768페이지가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각 페이지에는 나를 향한 꿋꿋한 신뢰가 담겨 있다.
요가매트 위에서 수련할 때, 근육이 몇 퍼센트가 붙고 유연성이 얼마나 길러졌으며, 마음이 얼마나 더 깊어졌는지 이런 수치를 계산할 순 없어도 그날 매트 위에서 애쓴 흔적은 스스로 새길 수 있듯이, 책을 작업할 때도 마찬가지다. 더 시간을 들였다고 누군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 시간에 비례해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은 조금 더 잘하고 싶어서 내가 많이 종종거리며 애썼다는 걸 알고 있다.
올해 더 기뻤던 건 예전 같으면 이 책들에 한 해 에너지의 80퍼센트 이상을 쏟았을 정도로, 일에만 지나치게 신경 쓴 해도 있었는데, 올해는 그렇지 않았다. 책도 열심히 만들었지만 ‘일상의 나’도 아끼며 지켰다.
사람도 인연이 있듯 책도 인연이 있다고 믿는다. 내년엔 또 어떤 책을 어떤 마음으로 만들게 될까. 거기서 또 어떤 경험을 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까. 어떤 모험이 펼쳐질까. 적어도 회피하고 타협하지 않는 내가 되길, 지금처럼 꾸준히 마음 쓰고 애쓰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