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글쓰기가 두려우신가요?”라는 이 질문에 나는 0.001초 만에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실은 지금 이 글도 며칠을 미루고 미루다가 썼다. 나는 왜 이리도 글을 쓰는 게 두려울까. 이 두려운 마음은 내게 아주 오랫동안 굳은살처럼 단단히 박여 있었다. 이 고민을 해결하고 싶어 적어도 일주일에 한 편의 글을 써서 브런치에 올리자고 나 자신과 약속했고, 그렇게 실천해가면서 조금은 나아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글쓰기가 두렵다.
그러다 한 달 전 건강검진을 선릉역 주변에서 받았고 근처에 있는 최인아책방에 들러 이 책을 발견했다.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라는 제목을 본 순간 사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의 가장 큰 고민을 덜어줄 수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펼쳐 읽으며 회사로 복귀하는 지하철 안, 정말로 내가 원하던 내용이 콕 담겨 있어서, 작가님의 글이 너무나 좋아서 그 시간이 여행 같았다.
이 책을 집필하신 정지우 작가님은 정말로 매일 글을 쓰시는 분이다. 문학평론가로서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시고, 자신의 페이스북에도 매일 한 편씩 양질의 글을 올리신다.
김겨울 작가님은 이 책의 추천의 글에서 정지우 작가님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그와 알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단 한 순간도 작가가 아니었던 적이 없으며, ‘작가’라는 말이 ‘글을 쓰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잊은 적도 없다."
정지우 작가님은 대학 시절 국어국문학을 공부하시다가 변호사가 된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계시기도 하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이십 대 초중반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밤낮으로 글을 썼고, 글을 잘 쓰게 하리라 믿어지는 모든 일을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쓴 글이 지금까지 못해도 A4 1만 장은 될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글쓰기에서 더 핵심적인 것은 먼저 글 쓰는 ‘몸’을 만드는 일이라고 믿고 있다. 어떤 구체적인 구상을 가지고 자리에 앉기보다는, 일단 자리에 앉으면 먼저 손가락이 움직여나가고, 그래서 손이 마음을 이끌고, 마음이 머리를 이끄는 그런 ‘자세’에 대해 아는 것이 언제나 글 쓰는 일의 출발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8쪽
이 책은 ‘글 쓰는 자세’에 대해서 진중하고 깊이 있게 알려주기에, 책을 읽으며 내가 글쓰기를 그토록 두려워하는 이유에 대해서 조목조목 생각해봤다. 거의 네 가지 이유였다.
① 어떤 소재를 써야 할지 모르겠다.
②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할지 막막하다.
③ 내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④ 누구를 향해 쓸지 고민된다.
작은 답이라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책을 두 번 정독해서 읽었고, 책에서 찾은 해결책을 나름대로 정리해봤다.
① 어떤 소재를 써야 할지 모르겠다
→ 오늘 하루 중에서 내가 느낀 걸 써보자.
나는 가만히 오늘 내게 스쳐 지나갔던 무수한 인상들을, 그 속에서 느꼈던 어느 순간의 감정들을, 내가 미처 글로 표현하지는 못했으나 글로 될 가능성을 품은 어떤 덩어리들을 비로소 잡아낸다. 그런 덩어리들을 차분하게 빚어서 한 편의 글을 쓴다. 글 쓰는 자아는 나라는 인간의 하루를, 삶을 재료 삼아서 글을 빚어낸다. 나라는 투망을 삶이라는 바다에 던지고, 낚아 올린 몇 가지 물고기로 요리를 한다. 그렇게 한 편의 글을 만들어낸다. -41쪽
→ 마음에 남아 있는 걸 매일 털어낸다는 생각으로 써보자.
글을 쓰면서 도망친다는 것은 끊임없이 나를 새로운 백지로 만드는 일이다. 내 마음을 붙들어 매는 것, 내 마음을 얼룩지게 한 것을 지우고, 채운 것을 털어냄으로써 끊임없이 다시 백지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글쓰기를 추동한다. 백지 위에는 다시 오늘의 감각, 생각, 관념이 도래하는데, 오직 백지 위에만 그러한 새로움이 찾아올 수 있다. 그래서 글 쓰는 이는 신을 모시기 위해 목욕재계하듯이, 자기 안의 언어들을 매일 털어낸다. 매일 털어냄으로써 매일 찾아오는 언어를 채울 수 있다. -107~109쪽
나의 글쓰기는 대개 내 마음을 관리하기 위한 과정이다. 글을 쓰기 전에는 어떤 글을 쓰게 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일단 키보드를 부여잡고 써 내려가면서 내가 속한 상황을 더듬어보고, 나 자신을 일으키고, 삶을 바로잡아보고자 애쓴다. 그렇게 써나간 여정은 때론 일기장에 갇혀 누구에게도 노출되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 과정을 그대로 내보인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은 일, 혹은 좋은 일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92쪽
②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할지 막막하다
→ 우선 첫 문장부터 생각하자.
첫 문장이 떠오르면, 글을 쓰고 싶어서 마음과 손이 근질거린다. 이 첫 문장에 이어지는 한 편의 글이 어떤 것일지 스스로 궁금하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쓸 때, 그 속에 담길 모든 내용을 미리 메모하거나 계획해놓고 쓰지는 않는다. 오히려 첫 문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뭐랄까, 첫 문장이라는 두루마리를 어딘가에서 받으면, 글 쓰는 일은 그냥 그 두루마리를 풀어놓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흑백인지 컬러인지, 그림인지 글인지, 평면인지 입체인지도 알 수 없는데, 글을 써나가다보면 비로소 알게 된다. -18쪽
→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자세히 떠올리자.
내가 보낸 하루에 관해, 그 하루가 그저 ‘좋았다’, ‘행복했다’, ‘즐거웠다’고 이야기해버린다면 글쓰기는 시작될 여지가 없다. 대신 그 하루의 세부들을 떠올리면서, 그 하루 전체가 나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를 더듬어가다보면, 글쓰기는 어느덧 한참 동안 이어지게 된다. -32쪽
③ 내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 각자의 ‘시선’은 고유하기에 내가 쓰는 글 또한 유일무이하다.
글쓰기는 글쓴이의 시선의 힘을 드러내는 일이다. 같은 대상을 응시하더라도 오직 글쓴이만이 지닐 수 있는 시선으로 그 대상을 보듬고, 살려내고, 규정하는 것이 곧 글쓰기다. 그래서 글쓰기란 곧 어떤 시선을 지녔는지와 다르지 않다. -24쪽
나는 오늘도 글을 쓰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응원한다. 그가 좋은 글을 쓰리라 믿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그가 글을 쓰고자 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자’ 하기 때문이며, 그러한 기다림이 이 세상을 분명 더 낫게 만들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글 쓰는 자의 기다림은 옳다. 그가 발굴해낼 것 중에서는, 그가 아니었으면 결코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을 그 어떤 존재가 반드시 있다. -34~35쪽
→ 적어도 나에게는 의미가 크다.
대개 계속한 것은 시대를 뒤바꿀 만큼 엄청난 무엇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내 삶을 증명하는 고유한 무언가만큼은 남긴다. 계속하는 사람만이 만날 수 있는 삶의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을 오름으로써 삶이 내 것이 되고 신비로운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101~102쪽
작가야말로 세상의 수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다. 백지와 가장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일은 때로 가장 가까운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깊이를 넘어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내면의 진실들이 홀로 있는 밤, 키보드 앞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이나 웃음으로 쏟아진다. 차마 인정할 수 없었던 상처가 사실은 인정해도 되는 것이었음을 검은 잉크로 새기며 알게 된다. 말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진실이 사실은 말해져야만 했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과 화해한다. -165쪽
④ 누구를 향해 쓸지 고민된다
→ 하나만 알아두자. 한 명이라도 읽고 영향받는다.
세상에 내어놓는 글들을 허투루 쓴 적은 없다. 책이 적게 팔리든 칼럼이 거의 읽히지 않든, 그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는 한 사람은 반드시 있다. (…) 누군가에게 닿는다. 내가 가장 밀도 있는 순간들로 써 내려간 나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믿었던 그 시간을, 그와 같은 밀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고요한 밤에 읽어내려가고 있는, 내가 있던 그 쓰기의 시공간에 함께 속하게 되는 한 사람이 있다. -153쪽
누군가에게 간절히 닿고 싶은 글을, 그런 마음으로 끊임없이 쏟아내면, 그 편지는 어딘가 닿는다. (…) 아마 사람들은 누군가가 쓴 글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나 흔적 같은 것을 자신도 모르게 찾아낼 것이다. 결국 글쓰기에도 인생과 다르지 않게 마음이 이끄는 여정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것이다. 실제로 나 또한 어떤 글에서 종종 그 누군가가 정말 간절히 닿기를 바라는 마음을 만난다. 그러면 그 글을 읽어내지 않고는 지나칠 재간이 없다. -217쪽
→ 그러니 정성껏 쓰자.
그렇다면 역시 아무렇게나 글을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번의 닿음이 기적이고, 절실한 우연이자, 절묘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정갈한 마음으로 내가 믿는 진실을 온전히 담고자 애쓰게 된다. 되도록 좋은 문장을 빚어내고자 하고, 날것 그대로를 노출하며 받아들이기를 종용하는 폭력도 피하고자 한다. 할 수 있는 예의를 갖추어 나의 이야기를, 내가 생각하는 진실을, 내가 어루만지고자 하는 어떤 마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147쪽
글쓰기는 그 모든 것을 뚫고 어딘가로 나아가서 어딘가에 닿는다. 우주가 시작되고 100억 년이 지난 뒤쯤에 지구까지 닿아온 빛의 먼 여정처럼, 글쓰기도 어딘가로 쏘아 보내는 빛과 같은 것이다. 그 빛에 내 생명을 담고, 그 빛이 어딘가 도달해서 지구가 되고 생명이 되고, 그렇게 또한 나의 생명이 된다고 느낀다. 모르긴 몰라도, 참으로 많은 사람이 오늘도 나처럼 살기 위해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빛이 저마다 어딘가에 닿을 것이다. -227쪽
11월 중순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공개하는 글을 쓰는 건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노트북에 타닥타닥 글을 쓰는 순간을 좋아한다. 모자이크처럼 형체가 불분명했던 글이 한 편 한 편 완성될 때마다 깊은 치유를 받는다. 아마 내 글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도 나일 테지.
정지우 작가님께서는 최근에 올리신 페이스북 글에 ‘두려움’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리셨다.
두려움을 느끼는 건 잘못도 아니고, 겁쟁이라는 증거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잘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이든 대충하고 적당히 해치우기보다는, 정성과 진심으로 행하고 싶고 그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증거이다.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두려움을 끌어안는다면, 우리는 두려움 덕분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한 손에 두려움을, 한 손에 용기를 든다면 말이다.
여전히 두려움을 품고 글을 써 나가는 게 쉽지 않지만, 글쓰기 근육이 붙으면 더 나아질 거라고 기대한다. 내년엔 적어도 올해보다는 더 많은 글을 쓰고 싶다. 이 책을 책상 바로 옆에 두고 자주 바라보려고 한다. 그렇게 ‘글을 써보자’는 용기를 계속 내게 불어넣어 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