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심과 열심 Feb 20. 2024

“저는 이게 좋아요”라고 당당히 말하기

마감을 하며 배운 것

올해 첫 번째 책을 마감했다. 작년에 우연한 발견으로 시작된 책으로 지금에 오기까지 긴 여정을 항해한 듯하다. 어떤 형태의 책이 될지 막연함과 막막함의 시간을 지나 하나둘씩 단계들을 밟아가며 완성된 최종 파일을 보니 감격스럽고 뿌듯하다.

6년 전에 이직하기 위해 준비한 이력서에 이렇게 호기롭게 쓴 적이 있다.      


“책을 마감할 때쯤, 제 머릿속을 맴도는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이렇게 창조적인 일에 ‘왜 출판(出版)이라는 투박한 단어가 붙었을까?’ 제가 내린 결론은 ‘출산(出産)’할 때와 같은 마음가짐과 고통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처럼 다른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많을 때 ‘책을 만들고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점점 어렵지만 책들의 엄마가 된 마음으로 매일,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당연히 출산에 비할 만큼은 아니겠지만, 오랜 정성이 필요한 과정임을 여전히 느낀다. 이제 또 다른 책을 곧바로 시작하고 마감해야 하는 내가 이번 마감에서 배운 귀한 깨달음을 적어두고자 한다. 기록하지 않으면 휘발되고 말 테니까.


디자이너님께 배운 일하는 태도

작년부터 꼭 함께 작업하고 싶었던 디자이너님이 있었는데 다행히 시간이 맞아 처음으로 디자인을 의뢰드릴 수 있었다. 최근에 분야에서 유명한 책의 디자인에는 이분의 이름이 꼭 들어가 있었다. 디자이너님께서 메일을 보내실 때마다 “○○○ 편집자님, 안녕하세요” 하고 메일 서두에 내 이름 석 자를 꼭 써주셨는데 친절한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디자이너님께 일의 태도를 배우게 된 계기가 있다.

    

디자이너분들과 가장 먼저 진행하는 건 본문 시안 작업이다. 본문 디자인 발주서를 드리면 보통 약간 다른 서체를 사용한 두 가지 시안을 받게 된다. 이번에도 조금은 새로운 것과 안정적인 느낌이 드는 것 두 시안을 받았다. 시안을 보내주시는 메일엔 이런 말이 덧붙여 있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1번 시안이 마음에 드는데요. 보시고 편히 연락주세요.

   

흔히 시안을 받을 때면 첫 번째 순서의 시안이 ‘디자이너님께서 미시는 건가 보다’ 하고 미루어 짐작하곤 하는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씀해주신 분은 처음이었다.

이번 책은 분야 특성상 새로운 느낌이 좋았지만, 서체가 힘이 약해 보여서 가독성이 떨어져 보였다. 그래서 느낌이 비슷한 서체 중 좀 더 가독성이 높은 서체로 수정해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다음 날 수정한 시안을 보내주셨는데, 서체를 변경한 시안과 함께 이전 시안을 또 한 번 보내주셨다. 이번에는 이런 말을 덧붙이셨다.   


기존 서체도 나름의 분위기가 있어서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인데요, 바꾼 서체도 한번 살펴봐주시고 원고와 더 어울리는 쪽으로 결정해주세요.     


결정권은 나에게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뚜렷하게 말씀하시는 게 멋져 보였다. 이렇게 확신을 가지시는 걸 보고, 디자이너님의 관점에서 기존 시안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확신을 믿게 되었다. 결국 수정 전의 시안으로 결정했다.      

본문 시안뿐만 아니라 표지 시안에 있어서도, 내 의견을 귀 기울여 최대한 반영해주시면서도 본인이 꼭 지켜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한 의견을 주셨다. ‘제가 해봤는데 이게 최선으로 좋아요’라고 누군가에게 설득할 수 있기까지 그 분명한 자신감은 그냥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확신을 심어주는 디자이너님의 태도가 내게 많은 걸 가르쳐주었다.


우연에 기대기보단 시간을 쏟을 것

이번 디자인 과정에서 나도 하나의 성취감을 얻었다. 표지 작업을 할 때였다. 처음에 받았던 표지 시안이 기대보다 매력적이지 않았고, 마음에 꼭 드는 시안이 하나라도 빠르게 완성되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표지 발주서에 드린 것 중 디자이너님께서 반영해주시지 않은 방향을 추가 시안으로 잡아달라고 나 또한 집요하게 말씀드렸다.

서점 매대에서 발견한 참고도서가 있었는데, ‘이런 느낌이면 좋겠다. 이렇게 풀 수 있겠다’라고 시간을 들여 생각한 방향이었다. 그렇게 디자이너님께 며칠 시간을 드렸고 내가 꼭 원하던 방향으로 시안을 보내주셨다. 그리고 그 시안이 최종 표지로 결정되었다.      


이전에 표지 발주서를 보낼 때면 내가 원하는 방향을 최대한 설명하려고 하지만, 보내면서도 이 발주서를 풀어내는 건 오롯이 디자이너님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우연의 결과물’인 것처럼 기다려왔다. 디자인은 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방향을 또렷이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 결과물로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책을 만들며 배웠다. 어쩌면 좋은 결과물에 우연은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스스로 확신할 만큼의 시간을 쏟고 그만큼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는 걸 이번 기회를 통해 크게 배웠다.


일은 약속의 합이다

일을 하면 할수록 일정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누군가 하나씩 밀리게 되면, 기다리는 상대방이 생기고, 나중엔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번에도 나는 실수를 했다. 최대한 할 수 있는 한까지 며칠을 야근했는데도 본문 교정지를 넘길 때면 디자이너님께 말씀드린 시간보다 조금씩 늦어졌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꼭꼭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해놓고 또 못 지키는 한심한 상황이 생겼다. 스스로를 많이 비난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시간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했다는 건 핑계가 되지 않는다.

MBTI 유형 중 극 P 성향의 나는 계획 세우는 걸 좋아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세우지도 못한다. 하지만 일할 때만큼은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순 없다. 그래서 이전보다 일정표를 면밀하게 세우고 틈날 때마다 의식적으로 보고 또 보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비로소 재미의 영역을 느끼게 되었다

내 성향에 잘 맞는 일과 좋아하는 매체를 선택하긴 했지만, 일의 원동력은 늘 재미보다는 책임감이었다. 누군가의 오랜 인생의 결과물을 내 손끝이 닿아 망치게 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컸다. 울면서 책을 만든 적도 많았다. 첫 회사에서는 워낙 많은 책을 쏟아냈기에 수십 권을 만들어낸 과정이 진짜 내가 했다는 성취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직한 후 한 권 한 권 정성 들여 만든 결과물이 이제 어림짐작으로 30권을 훌쩍 넘기는 거 같다. 표지부터 본문 요소 하나하나를 고민해서 한 권씩 완성해낸 경험이 30번 이상 쌓인 것이다.

전공생이 아닌 나는 이제야 비로소 원고를 편집하며, 물성으로써 책을 만드는 과정이 조금은 즐김의 영역으로 다가오는 거 같다.      


외부 디자이너님과 진행했기에 인쇄 감리를 혼자 갔는데, 직접 운전해 인쇄소에 가서 열에 맞춰 주차하고, 인쇄소 분들께 익숙한 듯 인사드리고 대기실에 앉아 들고 간 샘플 교정지를 살펴보다가, 기장님들의 결과물을 꼼꼼히 살펴보고는 “너무 좋네요. 이 부분만 유의해서 찍어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경쾌하게 말씀드리며 인쇄소 문밖을 나와 다시 척척 운전해 복귀하는 내가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숙성’에 관한 문장을 만났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에서 ‘경험의 숙성’을 이야기하는 한 문장을 발견했다.     


젊은이들 대부분에게 더 나은 길은 ‘무언가에 숙달되는’ 것이다. 한 가지에 숙달되고 나면 그 관점을 통해 자신이 어디서 기쁨을 느끼는지 꾸준히 찾게 될 것이다.
- 《위대한 사상가 케빈 켈리의 현실적인 인생 조언》 65쪽     


어느덧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12년쯤 되었고, 이 일을 한 지 9년 차에 접어들고 있다. ‘능력이 숙달되는 기쁨'을 지금에서야 맛보고 있다. 여전히 매일 헤매고 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기에 이 즐거움을 느끼게 된 것 같다. 이번에 배운 깨달음을 잊지 않고 꾸준히 숙성해가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꾸준함이라는 변화의 기본값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