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내내 피어 있는 사랑
얼마 전 주말 친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팥죽을 쑤었으니 먹으러 오라고 하셨다.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우리가 보고 싶으신 것 같았다. 설 연휴 이후 할머니를 뵌 건 처음이었다. 팥죽은 따로 설탕을 안 넣어도 될 만큼 적당히 달았고, 입안 가득 새알심이 쫀득거렸다. 한 그릇만 먹기는 아쉬워서 한 그릇을 더 먹었다. 그래도 팥죽은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식사를 다 마치고 상을 정리하고 그렇게 인사를 드리고 나서려는데 할머니가 화분을 가지고 가라고 하셨다. 사계절 내내 피는 꽃이 있는데 나에게 주려고 키우셨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물을 많이 주지만 않으면 쉽게 키울 수 있다고 하셨다. 꽃 검색을 해보니 ‘제라늄’이었다.
집에 오자마자 햇볕이 제일 잘 들어오는 베란다 자리에 화분을 올려두었다. 꽃 색상이 다양한 제라늄은 색마다 조금씩 꽃말이 달랐는데. 할머니께 받은 빨간색 제라늄의 꽃말은 ‘진실한 사랑, 결심’이었다.
친할머니를 향한 내 마음은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은 기억이 많이 잊혔지만 어렸을 적 무언가 좋은 게 있을 때면 할머니는 하나는 오빠를 주고, 하나는 아빠를 주라고 내게 말하셨다. 정작 내 몫은 없었다. 자라는 내내 서운했던 경험들이 차츰 겹쳐 나는 할머니에게 소중하지 않은 존재라고 생각해왔다.
스무 살 중반쯤부터는 할머니와의 대화가 조금씩 편해졌지만, 다른 손주들에 비해 내게 별로 관심이 없으실 거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화분 위 예쁘게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자 정신이 퍼뜩 차려졌다. 우리의 관계에서 상대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건 바로 나였다. 할머니의 사랑을 마음대로 오해하고 왜곡하고 있었던 거다.
사계절 내내 피어 있는 꽃을 할머니는 어떤 마음으로 건네주셨을까. 내가 예쁜 걸 봤으면 하는 마음, 하루에 조금은 기분이 좋은 순간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내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내내 꽃처럼 활짝 피어 있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주시지 않았을까.
요즘 매일 하는 습관이 하나 더 생겼다. 화분의 흙이 마르지는 않았는지 꾹꾹 눌러 보는 거다. 그 후엔 꽃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렇게 할머니의 사랑을 깊이 채운다.
꼬여 있는 내 마음을 마주하게 된 일이 최근에 한 번 더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동료들과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데, 이번엔 소설을 읽었다. 인물들의 성격에 따라 타인과 관계를 맺는 상황이 참 다르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책과는 별로 관련이 없었지만, 평소 궁금하던 질문이 떠올랐고 용기 내어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내 얘기를 먼저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떠나서 나와 결이 맞는 사람과 맞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화할 때 쉽게 공통 주제를 찾기 어려울 거 같은 사람은 나와는 파장이 맞지 않다고 간주해서 친해지려는 노력을 잘하지 않는다고 터놓았다.
그러자 동료들이 말해줬다. 한 동료는 이런 구분 선 자체가 아예 없다고 했다. 상대가 나와 다르면 그 점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서 알고 싶다고 했고, 또 다른 동료는 자기 기준에서 악인만 구분하고 있을 뿐 누군가를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즐겁다고 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많은 장벽을 세워뒀는지 깨달았다. 내가 맺을 수 있는 관계의 양은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그 핑계로 관심의 촉을 열어두지 않았다. 피상적인 관계가 늘어나는 게 어른의 기본값이라는 변명만 대면서. 실은 누군가와 대화할 때 적절한 화젯거리를 찾으려는 그 작은 에너지도 쓰고 싶지 않아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 맞는 사람을 나누고만 있었던 거다. 옹졸하고 유치하게.
물론 그동안의 타성이 쉽게 사라지진 않겠지만, 누군가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말을 건네고 다가가는 노력을 다시 해보자고 결심했다. 하루에 딱 1mm씩만이라도. 시도하다가 어색해서 말문이 막힐 때면 할머니가 건네주신 제라늄을 떠올려보려 한다. 그렇게 응원과 사랑을 듬뿍 채우고서 만나는 모두에게 환하게 웃어주고 싶다. 티끌의 편견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