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 말할 수 없는 환대
세상이 꽃들로 만발하다. 이 계절만큼은 사람들의 들뜬 표정을 보는 게 좋다. 무표정한 얼굴들이 무장해제된 채 설렘으로 바뀌어 있다. 나도 이 시기를 일 년 중에서 가장 좋아한다. 벚꽃이 개화되고 세상을 환히 수놓는 2주 정도의 시간을 그해의 화양연화처럼 느낀다.
작년 이맘때는 이 순간이 아쉬워서 마음에 하나라도 더 담으려고 조바심을 냈는데 올해는 그런 열의를 가질 여유가 없었다. 세상이 축제인 이 계절을 잘 누리지 못하고 있는 나를 조금은 비난했다.
금요일 밤 회사에서 노트북을 켜고 앉아 있었다. 마감을 앞두고 있지만 다음 책 피드백을 해야 했다. 요소가 많은 책이라서 어떻게 답변을 드려야 할지 막막했다.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계속 마음을 잡고 또 잡고 꾹꾹 눌러서 밤 11시에 피드백 메일을 보냈다.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 운전해서 집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신도 차릴 겸 차 안에 음악을 크게 틀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지금 스트레스 한도치를 초과하고 있구나 자각했다. 이럴 때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허탈하다.
그래도 다음 날 기대되는 일이 있었다. 작년부터 배우고 싶었던 사진 수업 개강일이었기 때문이다. 강의 소개 글에 “순간을 포착해 생각을 표현하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무엇을 포착하며 살아야 할지 배우고 싶었다.
강의실이 회사와 비교적 가까워서 회사에 차를 대고 버스를 타고 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마라톤으로 도로 통제를 하고 있었고, 방향 감각이 없는 나는 유턴해서 같은 곳을 또 돌고 돌아 겨우 회사 주차장에 도착했고 20분이나 수업에 늦었다.
떨리는 손으로 강의실 문을 열었고 선생님의 따뜻한 인사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강의실 가득 사람들이 있었고 연배가 다양해 보였다.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분명 사진을 배우는 데 인생을 배우고 있는 듯했다.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선생님께서 뒤에 계신 이전 기수 선배님께 무언가를 물으시는데, 선배님의 이름이 내가 아는 이름이라서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진짜로 선배가 계셨다. 나를 보고는 쑥스럽게 웃어주셨다. 선배가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얼떨떨했지만 선생님과 특별한 사이셔서 오셨나 보다 싶었다.
작년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충청남도에 있는 선배 집에서 사진을 배우고 싶다고 이야기했는데 선배가 내게 자신이 들었던 이 수업을 권해주셨었다.
수업이 끝나고 선배에게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선배가 내게 샛노란 꽃이 피어 있는 화분을 수줍게 건네셨다. 그러면서 “축하해”라고 하셨다. 내가 이 수업을 듣는 걸 축하해주고 싶어서 어젯밤에 서울로 올라오셨다고 했다. 나를 위해서 오신 거였다… 선배는! 내 작은 시작을 격려하고 응원해주시러.
내가 진행하는 수업도 아니고, 무언가 성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단순히 취미로 수업을 듣기로 한 건데, 선배는 그 거리와 시간을 투자해서 나에게 꽃을 전해주신 거다. 선배가 나를 아껴주시는 그 마음이 너무 벅차서 먹먹했다.
선배와 나는 스무 살가량 차이가 난다. 십여 년 전 방송 일을 할 때 막내 작가였던 내게 선배는 까마득하게 높은 메인 작가셨다. 그렇게 대선배님으로 선배를 만났다. 여전히 나는 선배를 작가님이라고 부르지만, 한참이나 어린 나를 친구라고 생각해주셔서 늘 감사했다. 선배의 공간에도 여러 번 초대해주셨다.
선배는 선생님께도, 사람들에게도 나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으셨던 거다. 낯가림이 심하고 다가가지 못하는 나를 잘 아시니까. 선배의 깊은 사랑을 느꼈다. 선배 옆에 앉아 앞으로 수업을 함께 듣게 될 동기분들과 점심을 먹었다. 방송 일을 할 때 처음 보는 사람들과 무언가를 오순도순 같이 먹으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좋아하고 그리워했는데, 오랜만에 정겨운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선배와 근처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선배가 버스를 타시는 모습을 보고 길을 건너왔는데, 우연히도 작년에 벚꽃을 본 수많은 장소 중에서도 가장 특별했던 기억이 있는 한 대학교 앞이었다.
선배가 준 노란색 러넌큘러스를 들고 별처럼 반짝이며 흩날리는 벚꽃잎을 보았다. 선배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내는데 너무 벅차서 눈물이 고였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경험을 올해 몇 번째 하고 있다.
선배가 보내주신 문자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사랑은 주고받다 넘치고 흐르죠. 강물이 바다로 가듯이.”
선배가 선물해준 샛노란 러넌큘러스를 소중히 안고 버스를 탔다. 나라는 사람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에너지를 머금고 있는 듯한 환한 꽃이었다. 러넌큘러스의 꽃말은 ‘매혹, 매력’이라고 한다. 선배는 내가 매력적인 사람임을 알라고 이 꽃을 건네주신 거 같았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올해 봄꽃은 더 보지 않아도 아쉽지 않을 거 같다. 이미 내 마음속에는 꽃밭이 한가득 심어져 있으니까. 잊지 말자. 이 사랑과 환대를, 다정한 응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