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이란 터널을 통과하며 깨달은 것
올해 세 번째 책을 마감했다. 이 한 문장을 쓰기까지 기나긴 시간을 체감했다. 그동안의 기억이 미화되었을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만들었던 책 중 가장 힘들었다. 왜 그토록 힘들었을까. 이번 마감 과정에서 기억에 스치는 장면 몇 가지다.
#1.
원고가 조금 더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조판이 다 된 상태에서 외주 교정자님께 교정을 맡겼다. 받은 교정지에는 “너무 수정이 많아서 제가 다 민망하네요”라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페이지마다 온통 빨간펜투성이였다. 빨간 글자를 따라 찬찬히 읽으니 원고가 훨씬 좋아진다. 수정을 반영하는 게 맞았다. 마치 피가 범벅되어 있는 듯한 수정 사항을 한 글자 한 글자 한글 파일에 옮겼다. 이런 일을 해본 적 없기에 하룻밤을 새우면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일하다 졸다가 일하며 모든 체력을 다 썼는데도 3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2.
이 수정 작업을 저녁에 시작했다. 혹시 회사에서 날밤을 새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밤을 새우게 됐다. 사무실 안에서 아예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한 건 이 일을 하고 처음이었다. 통유리 창문 너머로 도시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가 어슴푸레 환해지는 장면을 보았다. 아침에 이전 책을 담당했던 작가님의 중요한 방송 촬영이 있었고 새벽 6시 지하 주차장에 딸린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촬영장으로 향했다. 밤을 새웠는데도 수정은 절반 밖에 하지 못했다. 머리가 윙윙 돌았다. 작가님을 오랜만에 뵈었다. 아무렇지 않게 환하게 인사드렸다.
#3.
밤 11시 반까지 일을 하다가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회사 밖을 나왔다. 집에 절반쯤 왔을 때 조금씩 쏟아지던 비가 홍수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와이퍼를 최대 속도로 올려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내 앞 버스의 비상 깜빡이 노란 불, 그 흐릿한 불에 의지해서 느릿느릿 갔다. 퍼붓는 비에 가려 차선이 보이지 않았다. 비틀비틀 차선을 넘나들며 앞의 구조물을 박을 뻔하며 겨우 집에 왔다. 주차를 하려는데 후방 카메라가 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주차선을 보기 위해 창문을 열었는데 비가 쏟아져 들어왔다. 에코백에 담아둔 교정지가 잔뜩 젖었다. 온몸에 비를 흠뻑 맞고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4.
마감하기로 한 금요일. 아침 7시부터 회사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저녁 6시가 되도록 디자이너님께 답변이 오지 않았다. 6시가 넘은 시각, 수정이 많아 오늘 마감은 불가능하다고 부속 디자인만 완성해서 주겠다는 디자이너님의 메일을 받았다. 팀장님께 파일을 드려야 했기에 밤 12시까지 회사에서 디자이너님의 메일을 기다렸다. 마감일에 마감하지 못한 건 처음이었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와 큰 소리로 울고 있는데, 금요일을 즐겁게 보낸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필 내 차 바로 옆에 주차된 차에 올라탔다. 소리가 지하 주차장에 울려 퍼지는 걸 몰랐기에 당황하며 집에 왔다. 여전히 메일은 오지 않았고 노트북을 켜고 애플워치를 찬 채 잠들었다.
#5.
디자이너님의 메일은 다음 날 아침 7시 반에 왔다. 디자이너님께서도 최선을 다해주신 게 느껴졌다.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1시까지 원고 전체를 다시 읽었다. 왜인지 한 글자가 빠져 있는 곳도 있었고 오류 60개를 발견했다.
#6.
일요일 오후 좋아하는 사람들과 공연을 봤다. 2주 동안 단 한 순간도 마음이 편한 적 없었는데, 이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니 조금 안정됐다. 오랜만에 마음에 점을 찍은 시간이었다. 든든한 응원 덕분에 마감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인쇄소에 표지 데이터를 올리고 디자이너님께 최종 수정 사항을 미리 보내놓았다.
#7.
오후에 인쇄 감리가 잡힌 월요일 아침. 인쇄판을 굽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오전에는 파일을 넘겨야 한다. 아니면 인쇄 자체가 취소된다. 그런데 오전 11시가 되도록 최종 수정 파일이 오지 않았다. 종교는 없지만 신에게 간절하게 기도했다. 10분쯤 지났을까 기적처럼 디자이너님께 수정 파일이 왔다. 오전 11시 50분, 인쇄소에 최종 오케이 연락을 드렸다.
#8.
인쇄 감리를 보고 오는 길, 저자분께 전화가 왔다. 초상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이미지를 교체해야 한다고 하셨다. 내게 말씀하시는 걸 누락하셨다고 한다. 주차장에 멈춰 제작 실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해당 페이지 인쇄가 아직 안 되었다고 하셨다. 인쇄기를 멈추고 본문 데이터를 교체했다. 오후 5시 45분, 정말로 이번 책을 마감할 수 있었다.
#9.
감기가 한 달 동안 낫지 않았다. 병원에서 지은 약도 먹었는데 이상하리만치 계속 아팠다. 목소리에선 쉰 소리가 났고 기침이 멈추지 않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회의실에서 일했다. 그런데 마감과 동시에 목소리가 돌아왔다. 몸이 아닌 마음의 문제였을까.
올해 중반을 넘어가는 시간 드디어 기나긴 터널을 뚫었다. 이제야 여름을 맞이하게 된 것 같다.
이번 마감을 하며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일정을 계속 맞추지 못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죄송합니다’라는 글자를 또다시 메일에 쓰고 있는데 메일 하단에 ‘OOO 올림’이라고 의례적으로 쓰는 내 이름이 처음으로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마감을 하고 이번 일에 대해 팀장님과 면담했다. 의지만으로 할 수 없는 건 분명히 있다고, 다른 사람이 일할 때 걸리는 시간을 하나하나 정확히 예상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중간에 엉킨 일정을 할 수 있다고 한 게 가장 큰 패착이었다. 일정대로 진행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멈추고 연기해야 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이번에 뼈저리게 느낀 만큼 다음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감 후 가장 좋은 건 드디어 ‘죄송합니다’ 늪에서 벗어났다는 거다. 죄송한 일을 했을 때 죄송하다는 말을 아끼지 말자고 다짐해왔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지만, 이번에 하나 더 깨달은 건 죄송하다는 말은 자주 할수록 지치고 무감해진다는 거다. 그러니 죄송할 일은 애초에 덜 만드는 게 맞다. 예상 시간을 최대한 예견하고 계획을 촘촘히 세우자. 그렇게 그 누구보다 나에게 죄송할 일을 만들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