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고 확실한 성취
감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이십 대를 보냈다. 2011년도에 입학한 대학을 2020년도에 졸업했다. 휴학을 몇 차례 하기도 했고, 구멍 난 학점을 메우기 위해 추가 학기와 계절 학기도 들었다. 긴 학생 신분을 유지하는 동안 영어 점수도, 대외 활동도, 자격증도, 하다못해 인맥도 만들지 않고 무엇을 했느냐면……그냥 놀았다. 나의 20대가 행복한 이유는 놀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혹은 무언가와 치열하게 싸웠다면 그때를 마냥 즐거웠다고 말할 순 없었을 것이다. 친한 친구 중 하나는 영화과는 네버랜드라고 했다. 영원히 학생 신분을 유지할 것처럼 살았다.
합숙 훈련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의 자취방에 모인 친구들과 밤새 PC방에서 리그오브레전드라는 게임을 했고 (매일 10 시간의 시간 투자에도 실버 랭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인터넷에서 여행기를 보고 꽂혀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시내버스 여행도 했고 (힘들어서 경상도 어느 소도시쯤에서 기차를 탔다) 밴드를 한답시고 관악부였던 고등학생 시절을 생각하며 트럼펫을 샀지만 석 달 만에 중고로 판매했고 (합주 2회, 음감회 1회, 공연 0회) 내가 만든 영화를 아무 영화제에서도 틀어주지 않아서 도피성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1년 계획, 6개월 만에 귀국) 내가 만든 영화를 아무 영화제에서도 틀어주지 않아서 홧김에 영화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함경도 황해도를 제외한 전국 8도를 한 번씩은 여행 갔고, 더 다져질 것도 없이 단단한 멤버십의 트레이닝을 위해 MT도 자주 갔다. 술은 잘 못해 거의 마시지 않았고 당구도 잘 못해서 거의 안 쳤다. 클럽이나 헌팅 포차에 가고 싶은 욕망은 있었지만, 그 앞에서 줄 서고 있는 게 꼴사납게 느껴져 가보지 못했다. 나라에서 하지 말라는 행위와 반사회적인 농담도 많이 했고 덕분에 많이 웃고 조금 울었다. 이것저것 많이도 하면서 놀았지만, 그래도 가장 재미있던 건 친구들과 영화를 만드는 일이었다. 팀원으로서 수십 개의 작업에 참여했고 내 영화도 다섯 편 찍었다. 그중에 관객과 만날 기회가 닿은 영화는 두 편 있었다.
만들면서 가장 즐거웠던 영화는 [멸종위기종]과 [무명]이었다. 멸종위기종은 완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름 어느 날 촬영을 한답시고 찾아간 한탄강에서 더위를 식히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출연 배우와 함께 강물을 휘젓고 걸어 다닌 일, 점박이 그라피티를 대책도 없이 무허가로 그리다가 도망가던 일, 전단을 배포하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섭외 없이 실제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했던 일들이 영화의 완성과 상관없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무명은 마지막으로 만드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다시는 찍을 일이 없을 테니, 촬영 중에 누구 하나 화낼 일 없이 웃으며 촬영하길 원했다. 일단 나는 그렇게 했다. 한 테이크 더 찍으려는 욕심도 없었고 마음에 드는 장면이 포착될 때까지 반복하는 욕심도 없었다. 팀원들도 모두 즐겁게 촬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제작 태도의 영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영화 중 처음으로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우리는 농담으로 이런 얘기를 많이 했다. 돈 쓰는 일만큼 재밌는 게 세상에 없는데, 쇼핑이나 여행의 배로 돈이 드는 영화 제작은 그만큼 더 재밌을 수밖에 없다고. 제대로 된 영화도 하나 못 만들어본 나와 친구들 간의 자조 섞인 농담.
그래,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대신에 즐겁기라도 해야 했을까? 하나둘씩 네버랜드 52기 동료들이 떠나갔다. 훌쩍 어른이 되어 연락이 끊긴 동료도 있고 비슷한 대륙을 찾아 떠나간 동료도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른’취급했던 그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은 현실이었다. 차례로 동료들이 떠나가며 홀로 남을 것을 걱정하던 그 시기부터는, 더는 네버랜드가 아니었다. 학교에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내가 되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정신을 못 차렸다.
괜히 멋져 보이려고 20대 전체에 영화를 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럴싸한 거짓말.
실은 20대를 노느라고 모두 썼다. 그것엔 후회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내게 남은 것이 없다는 것. 인생도 게임처럼 -그것이 쓸모없는 분야더라도- 여러 경험에 대한 축적된 수치가 가시화되었으면 좋았겠지만, 네버랜드 바깥의 현실에서는 어떠한 미사여구로 포장한들 내가 쌓아온 무형의 무언가는 그것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물론 나 또한 고작 이런 거를 대단한 것인 양 인정해달라고 호소할 생각 없었다. 다만, 이력서에 적지 못한 공란이, 나를 무언가 결여된 사람이라는 증거물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요가가 재밌었다. 요가의 생리학적 효과는 개인적으로 믿지도 않고,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것도 거의 없다(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진 않음). 요가를 수련한다고 표현하지만, 수련이라고 표현하기엔 고전 요가와 현대 요가는 기독교와 이슬람만큼 다르다. 요가가 가진 운동적인 특성 때문에 심신의 안정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결코 그런 뉴에이지 풍의 신비한 분위기가 내게 요가를 하게끔 하지는 않았다.
내가 재밌던 건 늘어가는 내 모습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숙이면 무릎 근처에서 겨우 오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거나, 무릎을 굽히고도 제대로 앉지 못했던 몸이 서서히 앉을 수 있게 되거나 다운독을 할 때 절대 닿지 않을 것 같던 뒤꿈치가 매트와 가까워져 갔다. 그리고 그것을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볼 수 있었다. 노력이 곧바로 가시화되는 됐던 순간이 인생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 눈에 보일 만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노력과 성취의 과정이 반복되고 작은 성취들이 모여서 큰 성취가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나는, 이것이 내가 평생 목말라 있던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증명. 내가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감각들은 나를 더욱 요가에 몰두하게 하였다.
6평 오피스텔에서, 요가를 하려면 매트리스를 들어 벽에 기대어야 하는 곳에서, 빨래를 건조하는 날에는 매트를 펼치기도 힘들었던 작은 공간에서, 24인치 모니터로 하타 요가가 빈야사 요가가 무엇인지 그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저 앱[Downdog]이 시키는 대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땀을 뻘뻘 흘리던 시간을 지나며, 어쩌면 요가 강사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처음 생각했다. 그건 뭐 하나 제대로 끈덕지게 해본 적 없는 이 삶에서 어쩌면 나 같은 사람도 해낼 수 있는 목표이지 않을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