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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 여행자 Jun 26. 2021

엄마와 이별하기로 했다.

나는 왜 엄마를 떠났나. 02

 다음날,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냈지만 마음은 옥이었다. 부글부글 끓었다가 서러움이 밀려왔다가 하며,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는 괴로움에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몰랐다. 영혼이 반 이상 육체에서 나간 것 같았지만 내게는 심장보다도 소중한 밝음이가 있었다.

 내 마음의 온도가 어떻더라도 아이를 보살피고 안아주는 엄마의 사명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티 없이 해맑은 밝음이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엄마는 지금 어쩌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육아로 몸이 바쁜 와중에도 엄마의 안부가 궁금하고 신경 쓰이고 마음이 불편했다.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딸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들고, 등짝 스매싱을 날리고 어린 손자를 안고 가버리라며 소리치던 어제의 사건을 어떻게 느낄까....

 

 지지 않고 소리치던 딸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번에도 나는 나쁜 딸, 여태까지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부모 원망이나 하는 못돼먹은 딸로만 여겨지겠지.

 


 엄마의 곁에서 딸로 살아온 지 30여 년, 그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함께 하고 산전수전을 다 겪었지만 우리 모녀 사이는 달라진 게 없었다.

 

 화나면 욱해서 길길이 날 뛰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엄마, 그런 엄마의 공격에 더 이상 호락호락당하지 않고 맞서는 딸. 서로를 할퀴는 끔찍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발톱이 보이지 않는다고 맹수가 순한 양이 될 수 있는가. 엄마는 언제나 우리에게 향한 발톱을 숨기고 있었고, 필요하면 그것을 꺼내서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마음을 꺼낼 수 없어서 밝음이를 보며 억지로 웃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했다.

 속으로는 여태 겪어왔던 가정 불화를 떠올리며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앞으로도 상황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확신으로 바뀌자, 깊은 절망감이 몰려왔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조용한 거실에 진동이 울렸다. 밝음이를 안아주며 휴대폰 화면을 빼꼼 들여다보니 '엄마'라는 두 글자가 떠있었다.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감정에 잠시 망설이고 있었고 울리던 진동은 곧 멈췄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고, 일상은 거침없이 돌아갔다.

 

 여동생은 약 2년 가까이 조카를 먼저 키운 육아 선배였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지 알고 있다며 사흘이 멀다 하고 전화나 카톡을 해왔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에는 열흘이 다 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런 여동생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하고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전화를 해보니 엄마와 화해하고 풀었다고 얘기하는 거였다.


 "사실 나랑 엄마가 싸운 것도 아니고, (중략) 우리 선아도 맡길일이 생겨서 엄마가 봐주기로 했거든.... "

 

 여동생의 이야기를 듣는데 갑자기 조금 허탈한 느낌이 들면서 '아, 엄마랑 화해했구나. 나한테 얘기하기가 껄끄러워서 연락을 못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고 왠지 좋지만은 않았다. 나 혼자 외톨이가 된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가라앉았다.


 마음을 차분히 하고 되짚어보니 여동생마저 엄마랑 갈등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전업주부이고 여동생은 일을 하고 있으니 육아 도움도 필요한 상황이었고 내가 여동생이어도 힘들겠다 싶어서 엄마랑 화해를 잘했다고 말해 주었다. 그건 물론 진심이었다.


 그런데 뒤에 이은 여동생의 말이 서운하게 들렸다.

 

"나까지 엄마랑 싸워야 하나 싶더라고, 어차피 언니랑 싸운 거니까 언니랑 엄마가 알아서 할 일이고..... "  

 내가 잘했다고 하다가 그 말에 조금 서운하다, 나 혼자 외딴섬에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라고 하자 여동생의 목소리가 조금 격앙되었다.

 

"아니, 언니는 그럼 내가 엄마랑 화해한 게 서운하다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라, 언니 상황이 그렇다는 거야. 그냥 혼자 생각에. 내가 왜 너랑 엄마가 화해한 걸 가지고 마음을 안 좋게 쓰겠니, 오해하지 마."


 내가 외딴섬에 떨어진 기분이라고 말한 게 마음에 걸린 건지 엄마랑 화해한걸 못 마땅해한다고 오해하는 건지, 여동생의 태도가 곱지만은 않았고 나는 여동생마저 등 돌릴까 봐 오해 풀라고 재차 말하고는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엄마와의 전쟁이 있던 그날로부터 2주 정도 되는 어느 날, 여동생과 나는 심하게 다퉜다.


 서로 남몰래 인 감정이 많았는지 할 말 못 할 말까지 참지 않고 퍼부어대며 싸웠다. 카톡으로 얘기를 하는데 카톡에도 감정이 실리는 걸 그때 느꼈다.

 우리 자매는 서로 모르는 안 좋은 감정들이 해소되지 못한 채로 어른이 되었나 보다.


 "난 창피해서 우리 다퉜다고 네 형부에게 얘기 안 할 거야. 그리 알고 너는 제부한테 말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 하고 말한 것을 마지막으로 동생과도 연락이 끊어졌다.






 나는 엄마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여동생도 마찬 지였다. 여동생과 이야기하며 화해할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었다. 그만큼 가족 관계에 질려있었고 오랜 가뭄으로 말라버린 땅처럼 내 마음도 말라가고 있었다.

 내 피붙이에게도 일절 신경 쓰고 싶지 않을 정도로 괴로운 나날이었다.


 몇 달이든 몇 년이든 일단 나의 친정식구들을 일체 보고 싶지 않았다. 엄마 목소리도 듣기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디론가 자유롭게 훨훨 날아 떠나 버리고 싶었지만 이미 내게는 지켜내야 하는 소중한 아이와 나를 아껴주는 믿음직스러운 남편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여태까지 갈등을 해결하던 방식을 버리고 회피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나는 엄마를 떠나갔다.


 30여 년을 함께 울고 괴로워하던 기억들 속에 행복했던 추억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가족들 속에서 최선을 다했고 누가 뭐래도 큰딸 노릇을 잘하려고 애써왔다. (엄마나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렇기에 다시는 엄마를 못 본다고 해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는 엄마와 친정 식구들을 안 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확신했고 밝음이를 위해서라도 더욱 그 방 법밖에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유년시절부터 기억을 더듬어봤다. 내가 7살, 여동생이 5살 되던 해에 엄마는 지금의 아빠와 재혼을 했다. 그리고 엄마와 우리 자매의 인생에 변화가 찾아왔다. 그건 내게 악몽의 시작과도 같았다.

 

 

 사람은 본래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흐려져 대부분의 기억을 미화시킨다고 들은 적이 있다. 안 좋은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즐겁게 기억된다고 한다. 그런데 나의 유년시절부터 사춘기를 거쳐 성인이 될 때까지의 기억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기억들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마음 깊숙이 들어있던 상처들이 건드려져 괴롭고 슬퍼졌다.


 모든 기억은 시간이 지난다고 추억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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