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살며 쓰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이제이 Oct 13. 2020

누구를 위하여 부고를 울리나

일주일에 한번 일요일판 로컬 종이신문을 구독한지 몇년 째 되었다. 전화를 들거나 컴퓨터를 켜면 뉴스는 어디에서든 읽을수도 들을수 있지만, Sunday Edition은 좀 특별하다. 매일 마주하는 정치, 경제 뉴스의 비중은 적고, 남편과 나의 관심분야인 가드닝, 하우스, 여행, 인테리어, 문화면이 특집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읽을 거리가 풍성하다. 신문을 양면으로 활짝 펴고 한쪽 모퉁이부터 꼼꼼히 읽어나가다보면 모니터속에서 클릭하는 뉴스와는 비할바 없는 재미를 준다. 아침을 느즈막히 해먹고 밥상도 안치우고 커피 두잔을 만들어와서 남편과 마주보고 신문을 읽는 시간을 나는 진심으로 즐긴다. 


남편과 달리, 일요일판 신문에서 꼭 놓치지 않는 나만의 "must-read" 섹션이 있는데, 그건 바로 부고(Obituary) 이다. 대개 매주 신문 지면의 4~5 페이지 정도를 부고란에 할애한다. 어림잡아 100명 정도의 부고를 싣고 있는것 같다. 처음 신문을 볼때는, 넘겨도 넘겨도 끝나지 않는 부고란에 당황했었다. 


대부분의 부고는 한뼘 길이 이내의 박스기사형태이다. 사진 한장과 고인에 대한 정보, 그리고 연락처. 하나씩 차근차근 내용을 읽어보면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다양한 부고를 접할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가 작성한 부고가 대부분이지만, 고인이 살아생전 직접 작성한 편지 형식도 심심치 않게 만날수 있다. 내가 존경하고 가깝게 지내던 선생님도 두 해전에 고인이 되셨는데,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전에 부고란에 실릴 글의 초안을 작성해 두셨고 친한 지인에게 부고란에 사용할 것을 부탁하셨다. 그분은 본인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 마지막에 시를 함께 실어 더 이상 슬퍼하지 말라고 부탁하셨다.


신문 전면의 부고란 (Startribune, October 11, 2020)


크게 보면 부고의 내용은 그 목적에 맞게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의 부고란은 정확한 장례식장 위치와 호실, 장례식 시간, 장지의 위치등이 명시되어 있다. 누구의 장인, 누구의 큰형, 누구의 아버지라는 정보는 조문 올 사람들을 위한 친절한 정보이다. 


그러나 이곳의 부고란은 조금 다르다. 평범하기도 하고 때로는 특별하기도 한 고인의 일대기가 간단히 서술되어 있다. 유명인도 아니다. 가까이는 내 선생님이었고, 내 이웃이다. 그들이 어디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누구이며, 어느 학교를 다녔고, 좋아했던 일들은 무엇이었는지. 누구와 결혼을 하고, 자식은 누구이며, 평소에 무엇에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어떤 성격의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진마다 빼곡이 들어차 있다.


그들은 손자 손녀들이 사랑하는 할머니였거나, 젊을때부터 마라톤에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고. 몇해전 낚시대회에서 대어를 낚아 상을 받았으며, 지역 도서관 사서로 한평생 일했던 사람이었다. 책읽기를 좋아해서 북클럽을 운영했으며, 신앙이 남달리 깊었으며,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에 파병되었던 군인이었거나, 캠핑을 좋아했던 사람이다. 누군가의 일생을 몇개의 문장으로 대신할 수 없겠지만, 글들을 읽고있자면 자주 입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사소하지만 소중한 생의 일면들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살았던 세상에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것을 문득  기분이 들기도 한다. 


사진은 더 흥미롭다. 흑백지면이지만 백발의 머리가 선연한 할아버지 할머니 사진이 많지만, 그누구보다도 눈부시게 젋고 아름다웠던 그분들의 젊은 시절 사진도 간간이 눈에 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영화에서나 나올법 한 올림머리를 하거나 군인 베레모를 쓰고 눈빛과 표정에 젊음이 가득한 사진을 영정사진 대신하여 올리기도 한다. 때로는 과거와 현재의 사진을 나란히 올려서 비교해볼수도 있었고, 증명사진 뿐 아니라 할로윈 코스튬 분장한 사진도 있었고, 낚시를 좋아하던 한 할머니는 젊은시절과 연세가 드신후에 찍은 낚시 사진을 남기셨다. 지난주 신문에는 한 애기 엄마가 젊어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전엔 본인의 묘비가 세워질 곳을 찾아서 활짝 웃는 사진을 찍어 남겨서 눈길을 끌었고 또 마음이 아팠다. 아이가 네살에 세상을 떠났는데, 묘비만 덩그러니 남은 곳에 와서 엄마를 기억하지 못할까봐, 늘 엄마가 그 자리에서 그렇게 웃고 있다는걸 남기고 싶었다는 설명도 함께 있었다. 


연세가 80- 90이 넘은 어르신들 부고가 단연 많았지만, 내 나이와 비슷한 중년의 사람들도 젊은 청년들도 가끔 부고란에서 발견할수 있다. 결혼을 하고 독립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이들은, "엄마 아빠의 사랑스러운 아들 혹은 딸이었다"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소식을 전한다. 고등학교 하키팀이었다거나 수영강사 혹은 인기좋은 베이비시터였다는 글을 읽으면 안타까움이 더욱 커진다. 나도 모르게 신문을 넘기며 이름뒤에 있는 높은 숫자를 보고 "오래 사셨네" 하려다가 행여 누가 들었을까봐 깜짝놀라 말을 주어삼켰다. 나이가 많든 적든 어떤 죽음이 안타깝지 않고 어떤 죽음이 당연하다고 느껴질까. 죽어도 되는 좋은 나이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부고에는 대부분, 노환이든 지병이든 사인을 밝히는 경우가 많다. 얼마전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의 부고를 보고 또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자살은 분명히 자연스러운 사인은 아니지만, 고인의 가족들은 그렇게 생을 버린,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이의 소식을 전하는데 솔직했다. 구절구절 읽어나가다보니 그녀가 최근 어떤 일들로 많이 괴로웠으며 그것이 그녀가 생을 지속해나가는걸 계속 힘들게 방해했다고 적혀있었다. 그렇게 생을 마감한 아내를, 딸을, 엄마를, 언니를 그렇라도 이해해주고 싶었던거라고 느껴졌다. 슬프지만, 그렇게라도 고인의 결정을 존중해주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부턴가 부고란을 읽으면서 짧지만 고인의 인생을 어림잡아 느끼게 되었다. 가끔 신문을 읽을때 이야기를 좋아하는 큰애가 오면 함께 부고란에 적힌 이름들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읽곤 한다. 아이가 "와 이 할머니 우리동네에 살았네?" "이 할아버지도 우리가 자주가던 캠핑장을 좋아했데" "이 언니는 15살이래" 하면서 부고란을 읽어내려가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죽은거냐고 묻는다. 여덟살 아이에게 죽음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그들 모두가 우리처럼 사랑하는 가족들이 었고 낚시를 좋아하고 산책을 좋아하던 사람들이었다는건 함께 얘기할 수 있었다. 이렇게 기억되는걸 보면 죽는다는게 그렇게 차고 어둡고 무서운것만은 아니라고.   


부고란을 눈으로 훑는 것은, 나와 연고가 없는 공동묘지를 구경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멀리서 볼때는 그저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지만, 그 사람들의 몇줄에 걸친 그들의 특별한 인생을 읽고나면 묘지 비석에 앉아있는 먼지를 손으로 닦아내는 기분이 든다. 먼저 세상을 왔다가 떠난 이들로부터, 지금의 나를 조금 멀리서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의 "부고"를 한번쯤 미리 생각해보는건 이상하거나 찝찝한 일이 아니라, 필요한 혹은 해야할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버이미지 by Mayron Oliveira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오만과 유튜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