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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Oct 27. 2020

오늘은 온종일 딴생각만 했다

올리브유를 조금 떨어뜨려 팬을 달구고 브로콜리를 볶는다. 젓가락으로 뒤적거리며 익히다가 가장 예쁜 초록색 빛깔을 낼때 불에서 내려 검은깨를 두어번 뿌린다. 누구에게나 가장 예쁜 초록색을 갖는 시절이 있다. 그 시절을 건너가는 이는 그때가 예쁜 초록색인지 회색인지 모른다는 것이 인생의 아쉽고도 재미난 일이기도 하다.


어제 제법 큰 솥에 끓여뒀던 미역국은 중간불에서 한번 더 뎁힌다. 미역국은 끓이면 끓일수록 깊은 맛이 들어 좋다. 알면 알수록, 함께하면 함께 할수록 좋은 좋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과는 바닥나지 않을 커다란 마음을 내어주며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다.


알이 굵은 배추 한포기를 부엌칼을 꺼내 여러번에 자른다. 노란 잎은 청경채와 버섯을 곁들여 샤브샤브를 해 먹으려고 두고, 손으로 한줌정도 잡아 길게 잘라내어 굵은 소금을 흩뿌린다. 보쌈에 함께 내면 되겠다. 녹지 않을것 같은 굵고 단단한 소금이 아무도 모르게 스며들어 배춧잎에 간을 들게 하고 부드럽게 만드는건 신기한 일이다. 서로 맞지 않을것 같은 사람들도 예상치 못한 인연으로 좋은 기운을 전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그런 사람들이 내 인생에 많지는 않았지만 나에겐 선물같은 일이었다. 남은 배추는 한입 크기로 잘라 액젓을 넣고 겉절이를 담고, 가장 큰 배춧잎 몇개는 배추전을 부칠 생각으로 따로 챙겼다. 된장을 풀어 배춧국도 끓일까 생각했지만, 남은 미역국을 이틀더 먹을수 있을것 같다. 겨울 배추처럼 열일을 하는 이가 또 있을까. 언젠가 나는 이렇게 저렇게 쓸모가 참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적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고 필요로 할때가 있었다. 그때는 바쁘긴 했어도 보람이 있었으며 마음이 충만했다고 느꼈지만, 많은 순간 소란스러워 나에게 귀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다.


토마토, 상추, 당근, 파프리카, 아보카도를 먹기좋게 썰고 새우와 우동국수를 삶아 큰 그릇에 넣는다. 간장과 올리브유 식초 그리고 마늘을 조금 넣고 샐러드 소스를 만들어 뒤적인다. 알록달록 온갖 색이 한데 모여있으니 경쾌하다. 먹지 않아도 눈이 즐겁다.  첫인상으로, 눈빛이나 몇마디 나눈 인사말 정도로 잘 알지 않아도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난 그 사람이 좀 부러울때도 있었다.


계란찜에 넣을 새우젓이 똑 떨어져서 소금을 넣었더니 맛이 영 덜하다. 별것 아닌것 같아도 그곳에 꼭 필요한 양념이 있다. 대신 소금을 넣긴 했는데 정성들여 섞지 않아서 일까? 계란찜 어떤 곳은 짜고 또 어떤 곳은 싱겁다. 함께 숟가락을 꽂아 계란찜을 먹던 아이들이 하나는 짜다고 하나는 싱겁다고 해서 웃었다. 사람도 늘상 유쾌하기만, 늘상 우울한기만 한건 아니다. 나의 어떤 부분은 늘 긴장되어 있고, 또 다른 부분은 허술하기만 하다.


밖에 눈이 내리고 추운데 찬 모밀국수를 먹겠다는 아이들을 말릴수가 없어 결국 점심으로 모밀국수를 차려냈다. 남편과 나는 따뜻한 국물을 만들어 같은 모밀국수를 먹었다. 언젠가는 추워도 한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이 맛있고 냉면도 국물까지 시원하게 먹었던것 같은데, 이제 정말 나이가 드는지 생각만으로도 몸이 움츠러든다. 좋은 때가 아니라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혼자서 해내고야 말았던 고집스러웠던 많은 어린 시절이 지나가는 기분이다. 이제 날씨에 계절에 맞춰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나뿐만 아니라 남편도 찬 모밀국수가 싫다고 해서 덜 외로웠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 혼자서는 귀찮아서 따뜻한 국수를 만들지 않았을테고, 그럼 지금쯤 아이들과 함께 차가운 모밀국수를 먹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을수도 있으니까. 오늘 만큼은 그와 함께 나이를 들어가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온종일 주방에 서서는 이렇게 딴 생각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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