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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Nov 03. 2020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아이도 없던 결혼해서 얼마 안된 어느날 저녁이었다.


남편과 무슨일로 주방에 서서 말다툼을 시작했다.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몇마디의 말이 오갔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 자리를 뜨며 일단락 되었다. 언쟁은 끝이 났지만,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까지 정리되지는 않아 부러 식탁을 행주로 닦았고 밥그릇이며 접시를 제자리에 정리하기도 했다. 둘 밖에 없는 집인데, 두 사람다 입을 꾹 다물고 불쾌한 기운만 코로 뿜어내다보니 매연이 자욱한 것처럼 숨이 막혔다. 남편은 남편대로 마음이 상했는지, 평소에는 잘 켜지도 않던 티비를 켜고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이 상태로 둘이 같이 집에서 더 시간을 보내다가는 질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잠깐 바람좀 쐬고 오겠다고 말하고는 집을 나섰다.


집에서 입던 옷에 가디건을 하나 걸치고 나와 차에 타고 시동을 걸었다. 집 근처를 벗어나 조금 달리다보니 그제서야 하늘이 보였다. 선홍색 해가 하늘을 물들였다. 해질무렵이었다. 라디오도 켜지 않고 무표정하게 운전을 한참 하며 달리고는 있는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수가 없었다. 차를 세우고 가야할 곳을 정하고 다시 출발해야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실은,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속상한 마음을 위로받을 친구에게 가고 싶었고, 아무말이나 해도 내 편이 되어 보듬어줄 엄마에게 가고 싶었다. 서운함을 뒤로 살짝 감추고 그냥 차한잔 하자며 가까운 동료에게 가고 싶었고, 별말 없이 함께 걸어줄 동생에게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12시간이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내가, 남편과 다투어 속상한 마음을 부여잡고 갈수 있는 곳은 없었다. 어쩌다보니, 마음이 허전하고 서글퍼도 찾아갈 곳이 아무데도 없는 곳에 덩그라니 혼자 살고 있었다. 


방향도 가늠하지 않고 그렇게 한참을 달렸더니 다운타운으로 접어들었고,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와 차를 세웠다. 그리고 문득 내 앞을 바라봤더니, 그곳은 얼마전에 지나쳤던 대성당 앞이었다. 호기있게 집에서 달려나와 내 힘으로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성당이었다니 피식 웃음이 났다. 차 밖을 나가서 성당 가까이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언덕 제일 높은 곳에 서 있는 아름다운 성당, 그리고 그 옆에 세워놓은 작은 차 안에서 성당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집을 나설때만 해도 노을 빛이 강렬했는데, 어느새 밖은 어두워졌다. 그래서 성당 불빛은 더욱 선명해졌고, 내 발 아래로 보이는 도시의 밤풍경은 낯설었다. 복잡한 감정들로 휘몰아치던 마음도 제법 잔잔해진것 같았다. 


결국 성당 앞에 차가 섰을때만 해도, 내가 갈수 있는 곳이 아무데도 없다는 사실에 힘이 쭉 빠졌었다. 그런데 성당 앞에서 마음을 좀 다스리고 나니, 갈수 있는 곳이 아무데도 없다는게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나에게 소용돌이 치던 감정들과 내가 만들어낸 갈등을 결국 해결하고 풀어나갈수 있는 곳은 "그 어딘가" "그 누군가"가 아니라 "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외롭지만 혼자 서야하는 시간이었다. 걸음마 배우던 아이가 엄마손, 아빠손, 언니손에 의지해서 한걸음씩 떼는걸 얼마간 배우고 난 후에는, 외롭지만 그 다음에는 그 손을 놓고 혼자 일어서고 혼자 걷는 시간이 온다. 나에게도 그 시간이 온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따뜻하고 안전했던 그 손들이 지금은 아주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영원히 그 손을 의지해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했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 살면서 어쩌면 정말 어른이 되어갈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성당 앞이라니, 행라도 불순하거나 나쁜 생각은 들이밀지도 못했으니 그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제 집으로 다시 돌아갈만큼 마음이 단단해졌다고 느꼈다.  


외출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티비는 꺼져있었다. 


남편이 어디 다녀왔냐고 물어보길래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성당!” 이라고 대답했더니, 의외라는 표현으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설마, 고해성사?” 라며 슬쩍 장난을 치는 남편에, 우린 둘다 “큭” 웃고 말았다. 집을 나설때만 해도 날카롭게 오고가던 말들과 무심한 눈빛으로 가슴에 돌을 하나 얹은 듯이 답답했었는데, “큭” 하고 웃는 순간 가벼워졌다. "아까 그말은 내가 좀 심했어"라며 팔을 둥글게 만들어 내 앞에 다가오는 남편에게 "맞아 당신이 좀 심하긴 했어" 라고 장난치며 남편에게 기대었다. "그래도 앞으론 성당에 가고 그러지마! 이상해"라며 한마디도 안지는 남편에게 안겨서 "진짜 갈데가 없더라" 하며 키득거렸지만, 더이상 외롭거나 쓸쓸하지는 않았다. 남편과 나, 두사람 모두 그렇게 걸음마를 혼자 떼어갔다. 그렇게 어른, 결혼한 어른이 되어 갔다.      


이제는 남편과 말다툼을 해도, 성당을 찾아가는 일은 하지 않는다. 어디에 가지 않아도 누구에게 털어놓지 않아도, 그날 아무런 생각없이 운전을 해서 어딘가로 달려가던 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이후도 우리 부부는 소소한 일로 끊임없이 말다툼을 하지만, 그 다툼을 끝내고 싶은 누군가가 먼저 "왜 또 오늘 성당 갈려고?" "나 자꾸 화나게 하면 성당간다!"라고 선수를 쳐서 상황을 종료시킨다. 


이제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엄마 아빠를 감시하는 딸이 둘이나 있어서 말다툼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간신히 결혼한 어른 두사람이 되었던 우리는, 이제 또 부모 두사람이 되기 위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살아가고 있다. 요즘도 가끔 외출하는 길에 언덕 제일 높은 곳에 반듯하게 서 있는 성당을 바라보면 그때 생각이 난다. 그날 운전대를 성당으로 돌린 덕분에 얻은것이 많다.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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