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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Nov 13. 2020

증명사진 한장

Photo by mike nguyen on Unsplash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고 한쪽 구석에 두었던 상자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장식 하나가 끈이 떨어져 들어가 있기도 하고, 어느해인가 아이들과 뿌렸던 꽃씨봉지가 있기도 한걸 보니, 여러 계절을 또 여러 해를 지나며 쌓인 것들이라 생각한다. 그 안에서, 여러개의 증명사진을 모아둔 작은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할때 찍었던 증명사진부터, 아주 최근에 여권을 갱신하며 찍었던 사진까지 예닐곱개의 증명사진을 한줄로 쪼르륵 줄을 맞춰 놓으니, 내 20대와 30대가 한눈에 보인다. 앳되었던 얼굴이 뒤로 갈수록 나이가 들어가는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늘 비슷비슷한 머리모양이나 증명사진 찍을때마다 어색해하던 내 눈코입도 여전했다. 좌우가 아주 약간 다른 입술모양때문에 증명사진을 찍을때마다 신경이 쓰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줄맞춰 서있는 증명사진들에서 입술만 도드라지는 기분도 들었다. 


언제 그 사진들을 찍었는지, 어디서 찍었는지, 왜 그때 사진을 다시 찍었는지 하나 하나 기억이 떠올랐다. 한국에 잠깐 방문했을때 운전면허를 갱신하려고 면허시험장에 가서 찍었던 즉석사진, 대학 졸업앨범사진을 찍는다고 아침일찍부터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하고 찍었던 사진, 입사원서에 행운을 빌며 붙였던 사진, 유학을 오겠다고 학생비자를 만들때 집 앞 사진관에서 찍었던 사진, 만료된 여권을 갱신하려고 찍었던 사진. 그 사진을 찍을때의 내 상황과 감정까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매 순간, 한 걸음씩 세상을 걸어가면서 남긴 나의 흔적이었고 나의 이야기들이었다. 


그중에서 대학 졸업사진을 한장 들어올렸다. 그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민과 생각이 그 어느때보다 많았던 시절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기대도 꿈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설마 내가 외국에서 공부를 하게 될지도, 그러다가 오랫동안 그곳에 살게 될지도 몰랐다. 밝게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은 아니었지만, 담담하고 편안한 사진이었다. 눈빛은 부드럽고 미간에 주름같은건 없었다. 어찌되었든 내 마음에 드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어디로 가져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기를 실리콘 케이스에서 꺼내 그 안에 사진을 넣었다. 전화기 안에 디지털 사진이 3천장 가까이 있는데, 오래된 증명사진 한장을 전화기 뒤에 밀어넣어둔다니 아이러니하다. 거기에 내 증명사진이 있다는 건 나만 아는 사실이다. 아니 케이스에 가려져 보이지 않으니 그 이후로는 나도 자주 잊고 있다. 


그렇더라도 ...

그 사진은 나에게 일종의 기도문같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행운의 징표같은것. 

나의 반짝였던 시절을 기억하라는 조언같은것. 

뭐든지 할수 있을것만 같던 기대에 찼던 나를 떠올리라는 암시같은것. 

그맘때의 건강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갖고 싶다는 주문같은것.

생각만으로 따뜻하고 다정한 한끼  같은 것.

그런 것이다.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한동안 나와 동행하는 그 시절의 나 덕분에 마음이 한결 더 편안했다. 순간순간 자신감이나 삶의 목표가 흔들릴때마다, 별일 아닌것으로 축 쳐져서는 힘이 다 빠질때마다 부러 꺼내지 않더라도 내 가까이에 있는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손을 가만이 전화기 위에 얹어두는 것으로 한숨 쉬어갈수 있었다.


과거의 나로 인해 힘을 얻고 마음을 달래고 어루만질수 있다는건, 그 누구의 조언이나 충고보다 든든한 일이다. 그 시절의 나를 미래의 내가 감사하게 되리라는건 그 사진을 찍을땐 알수 없었던 비밀스러운 운명이었다. 




커버이미지 Photo by mike nguye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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