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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Nov 25. 2020

3인칭 여성명사로

대학교 신입생 시절이었다. 나는 재수를 해서 동기들보다 한살 많았고, 동기들 중에는 생일이 1월 2월이라 빠른 몇년생 애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나랑은 거의 두살정도 차이가 나는 동기들이었다. 나이 많은게 자랑도 아니고 지내다보니 한살이 많건 두살이 많건 곧 친구가 되었다. 가끔 처음에 “언니” 혹은 “누나”라고 불러야 되냐고 물어오는 애들도 있었는데, 그럴땐 내가 나서서 상황을 종료시키기도 했다. “행여나 그러지 말라고! 나 한살밖에 안많아!” 이러면서. 이렇게 해외에서 오래 생활하다보니 나이 한두살에 이렇게 예민하게 굴었던게 이제와서는 추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동기들과 이름을 서로 부르며 말을 놓고 잘 지냈는데, 그중에 한 남자애가 있었다. 그 아이의 느낌을 되살려보자면 넉살좋고 두루두루 지내는 타입이 아니라 깍듯하고 생각이 많아보이는 아이였다. 몇번 모임에서 보고 얘길한적도 있었는데 신입생 초기라서 그랬는지 나에게 경어를 썼다. “아유 너 왜그래, 그냥 말 편하게 해!” 라고 해도 쉽게 말을 놓지 않았다. 그 애는 바로 그 빠른 년생이라 나와는 2년정도 나이차이가 났다. 몇번 설득 끝에 어색하게 반말을 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절대로 나를 “누구야” 라고 부르진 않았다. 그냥 옆에 와서 “저기” 라고 말하던가 부르지 않고 눈을 맞춰서 얘기를 시작했다. 아직도 어색해서 저러나보다 생각했다. 


그러다가 수업가는길에 만난 친구 하나에게 충격적인 얘길 들었다. 어제 과방에서 그 아이랑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내 얘기가 나와서 얘길하다가, 그 애가 나를 성과 이름을 다 붙여서 “누구누구씨”라고 지칭하더니 심지어 “그여자” 라고 했다고. 풉 … 아니, 대학교 1학년 동기끼리 누구누구씨는 뭐고 그여자는 뭐야, 과방에 있었던 애들이 다 웃었다고 했다. 장난기가 슬슬 발동한 나는 강의실에서 만난 그 애에게 다가가서 “나야 나, 그여자!, 너 자꾸 이럴래?” 했다. 갑자기 나를 지칭해서 얘길해야 하는데 마땅히 부를말이 없었다는 변명을 했다. 나이도 자기보다 두살많은데, 만나서 반말로 얘길하는것도 어색한데, 없는 자리에서 이름만 달랑 부른다거나 얘, 걔 그렇게 말하는게 어째 내키지 않았다고. “그래도 그여자가 뭐냐 그여자가, 너도 참” 여튼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우리과의 “그여자”가 되었다. 다행히 그리고 나서 우리의 호칭관계는 조금 더 편해지긴 했는데, 그렇더라도 그애는 내 이름뒤에 “야”를 붙여서 “누구야!” 예컨데 “콩쥐야” 라고는 부르지 못했다. 아마 졸업할때까지 그렇게 부르지 않았던것 같다. 부를 일이 있으면 “야”를 빼고 “콩쥐!” 이렇게 이름만 심플하게. 아마 “야!”를 붙이기도 그애 말마따나 어째 내키지 않았을지도. 


“그여자” 사건은 아직도 가끔 대학동기들과 만나서 자주 올리는 일화이다. 걔는 진짜 무슨생각이었던거야 라면서 킥킥대지만, “그여자”라는 말을 들으면 작은 체구의 골똘히 생각하던 그애의 고민에 찬 표정이 떠오른다. 그래 나름대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일 지라도. 어쨋든 “그여자”라는 3인칭은 인칭대명사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꽤 낯선 말이었다. 그 친구, 그 애, 그 사람, 그 누나, 그 동기도 아니고 그 여자라니. 심지어 그 미인도 아니고.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애가 혹시 해외에서 살았던게 아닌가 싶다. “그여자” 라고 성을 구분한 인칭대명사를 굳이 사용했던것을 보면 말이다. 그냥 “그사람”도 아니고 “그여자” (혹은 다른 재수생에게 “그남자”를 사용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라는 말을 쓴걸 보면 이게 너무나 영어식 표현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이 영어의 She/he 를 쓸때 실수가 잦은 것도 우리가 여성/ 남성을 구분한 인칭대명사에 익숙하지 않아 생기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아니 그 아이 교포였음? 


미국 사람들이 나이의 고하에 상관없이 편하게 이름만 부르는건 미국에 오래 살아도 인칭대명사처럼 영 적응이 안되지만, 때로는 간편하다고 느낄때도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할때는 그렇다. 옆집 할아버지한테도 존, 뒷집 신생아한데도 존, 친구네 강아지한테도 존 일때 말이다. 얘네들 대부분 가족에게는 그래도 이름말고 grandpa, grandma, uncle, aunt 를 쓰긴 하지만, 그 대신 이름을 쓴다고 해도 흉볼일은 아니다. 성당에 한국 할머니가 미국인 손녀에게 “수잔, 같이 영화볼래?” 라고 불리는 것을 보고 처음엔 기겁했지만 뭐 그럴일도 아니다. 동방 예의지국에서 온것이 마음의 짐이었을뿐 의연하게 대처하는 법도 터득했다.




그런데 이게 내가 불릴때는 또 다른 문제다. 우리 아이들은 물론 나에게 이름을 부르진 않는다. 보통 엄마아빠한테 이름부르는건 여기서도 흔한일은 아닌것 같다. 그리고 마미, 맘 대신에 ‘엄마’라고 부른다. 아이들도 ‘엄마’를 좋아하고 나도 ‘엄마’라고 불리는 것이 더 좋다. 나와 얘길할때는 “엄마 어쩌고 … “ 하는게 지들에게나 나에게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어느날 내가 머리가 좀 아파서 침대에 잠깐 누워있는데, 큰애가 방문을 살짝 열었다가 나를 살펴보곤 나갔다. 그리고는 둘째가 언니에게 “Where is mom? Is she sleeping or what?” 라고 하는것이다. 뭐라고? SHE? 그녀? 엄마, 아니 맘이라도 괜찮았는데 갑자기 3인칭 여성대명사 SHE가 확 섭섭했다. 그래도 나한테 she 라니 뭔가, 거리감이 확 생기고 엄마 뱃속따위에선 나오지 않았어 라고 선을 긋는듯한 느낌? 이게 다 오버라는것 안다. 이런 섭섭한 마음 끝에는 아, 내가 자식과의 관계에 너무 집착하는거 아니야? 3인칭으로 객관화할필요가 있지 뭘 그래 .. 라면서도 내가 널 내 배로 낳앗는데 she는 좀 그렇지 않니? 라며 안그래도 아픈 머리가 더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물론 미국 엄마들도 다 애들은 배로 낳지만 말이다. 


처음 한두번 영 적응이 안되다가 몇번 들으니 이젠 괜찮아졌다. 그래 엄마든 아빠든 우리도 다른사람에게 얘기할땐 당연히 “그” 이고 “그녀”가 맞지, 뭐 그런걸로 예민하게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 둘이서 속닥속닥 “Is she mad? I think she is too strict.” 라고 하는게 들리면, 이것들이 진짜 .. 뭔가 불끈하는게 느껴지는건 어쩔수 없다.


며칠전 남편이 커피를 만들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갸웃한다. “왜, 무슨 생각하는데?” 물었더니 “아까 애들이 놀고 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나보고 he 래. 아, 이거 미국에 오래 살아도 자식한테 불리는 he는 영 적응이 안된다.” 라고 말한다. 킥킥 …그치? 당신도 그렇지? 나도 그래. 혼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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